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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Sep 13. 2023

단 하나의 눈송이

by 사이토 마리코

카페에서 책을 읽다 수줍은 남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처음 만나서 이야기하는 소개팅 자리였고 두 사람은 시종일관 웃으며 좋은 대화를 이어 나가는 듯했습니다. 좀 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싶었지만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과 예의에 어긋남을 알기에 그냥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고 가방에서 조용히 책을 꺼내 펼쳤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떠나고 없는 그 사람에게 마음으로 감사해하며 읽던 책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몇 시간 뒤 집에 왔는데도 그 잔상이 계속 남았는지 시집을 한 권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 시집은 사랑에 걸맞은 어떤 태도나 자세가 있다면, 물론 정답은 없겠지만, 이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집입니다. 우리들은 디테일하게 보면 다 다르지만 어떻게 보면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그 수많은 존재들 속에서 오직 하나의 존재를 발견하는 일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 작가의 시들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단 하나의 눈송이를 그 유일무이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라보는 일이라고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은 결코 한 존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이라고 상기시키며 지지 않는 꾸준함도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사랑의 과정을 서로 다른 시로 이어져 나가는 듯합니다. 같은 사랑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을 하는데 풋풋했던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사이토 마리코라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사랑했던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처럼 용기 있어 보였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느 한 공간과 시절을 떠올리며 사랑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언어를 향한 사랑처럼 보였습니다.


사이토 마리코는 1991년 봄부터 1992년 초여름까지 우리나라에 머물렀습니다. 1년 2개월 동안 한국어로 시를 쓰기도 하면서 1993년 한국어 시집 <입국>을 출간하며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책에는 <입국>의 기록, 갓 서른의 문턱을 넘은 그녀가 겪은 90년대의 서울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천천히 읽고 있으면 저는 잠시 잊고 지낸 한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막 사랑에 빠진 그녀의 표현은 몇몇 페이지에 나열되어 있는데 조금은 서툰 한국어 때문에 오히려 더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표현을 해서 되레 완벽에 가까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보라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같이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다.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하나씩 눈송이를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 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께 야단맞을 때까지 열중했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일본에는 눈송이나 숨결과 같은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그녀는 눈송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 발음이 좋아 눈송이를 써서 시를 짓고 싶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녀처럼 발음해서 내뱉을 때에 좋아지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 “정가하다.”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고요하고 아름답다는 뜻인데 이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책을 읽는 그 시간과 결이 같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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