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포도주

로맹 가리

by 무무

모든 소재들이 글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으로 나오기에는 부족하고 계속 수정을 하더라도 또 유명한 작가여도, 출간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작가들은 매일같이 글을 쓰고 있고 그 문장들에게서 잠시 떨어져서 다시 글을 쓰기도 합니다. 마르케스 같은 경우에는 첫 문장을 찾는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하지만 찾으면 일사천리라고 합니다.) 카뮈처럼 예전에 쓰던 문장들만 따로 골라내어 여러 권의 책들로 나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책은 로맹 가리가 열아홉 살에 쓰기 시작해 스물세 살이던 1937년에 탈고한 첫 장편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십 권에 이르는 그의 책 중에서도 이 책의 출간은 가장 늦어져서 프랑스에서도 2014년에야 책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그가 죽은 지 34년 만에 일이었습니다.


이 책은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주인공 튤립이 철책을 넘어 공동묘지에 들어가서 겪는 환상적인 일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은 자들의 영토인 그곳에서는 해골과 주검들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고 말을 하며 생시와 다를 바 없는 욕망과 충동을 표출합니다. 목매 자살한 이가 다시 목을 매고 싶어 하는가 하면 생전에 창부였던 여자는 죽어서도 남자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무질서와 혼란, 공포와 블랙유머의 놀이터가 되는 이 책은 우리가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한없이 더럽고 저열하고 악취 나고 혐오하는 모든 것들을 연극 무대에 올려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는 책입니다.


2014년 처음 공개되기 전에도 이 책에 관한 언급과 소문은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자신이 에밀 아자르임을 밝힌 책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그는 자신이 썼던 <가면의 생>을 이야기하며 이 책에서 따온 두 구절이 있음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고를 온갖 전쟁이며 풍랑이며 대륙들로 끌고 다니며 던져두었다가 붙잡기를 되풀이했다고 밝힙니다. 이 소설은 로맹 가리가 청춘부터 성숙한 시기까지 줄곧 들고 다니며 수정을 계속하였지만 끝내 자신의 손으로는 책을 내지는 못한 안타까운 책입니다. 그의 생전에 원고 상태를 탈피해 책으로 변신하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 암시적으로 스며들거나 파편적으로 재활용되었습니다. 1992년 경매에서 이 원고를 손에 넣은 편집자 필리프 브르노는 해설에서 소개하듯 원고 일부가 직접 포함되거나 간접적으로 영향 관계를 추적할 수 있는 로맹 가리의 다른 작품들로 <가면의 생>은 물론 <자기 앞의 생> <유럽의 교육> <그로칼랭> 등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거꾸로 이 책 또한 다른 작가 및 작품의 영향을 받았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페스트 왕>,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코> 등에서 영감을 얻어 쓰였습니다.



P 첫 문장 : 튤립은 묘지의 철책을 기어올라 건너편으로 철퍼덕 떨어졌다.



이 책에는 자신의 본명인 로만 카체프와 가장 가까운 로맹 카체프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원고를 가지고 여러 출판사에 보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게 되었습니다. 1938년 연인이었던 스웨덴 기자 크리스텔 쇠데룬드에게 사랑의 증표로 주었고 그 뒤 잊힌 듯했던 이 원고는 1992년 파리에서 열린 한 경매에 나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곧바로 출간되지는 못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어 우리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