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콜럼버스
굿바이, 콜럼버스 - 필립 로스 [문학동네]
책을 읽고 나면 마치 알래스카에 있는 얼음 창고에 갇힌 것처럼 온몸에 얼얼함을 주는 책을 쓰는 작가가 있습니다. 저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작가가 바로 필립 로스입니다. 하지만 그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데뷔작인 이 책은 표제작인 <굿바이, 콜럼버스> 릉 비롯해 여섯 편의 단편소설을 실어서 데뷔를 하였습니다. 확실히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에브리맨> 같은 능숙하고 아름답다고는 볼 수는 없지만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고치고 싶은 부분이 가득 있는 이 책을 읽어보면 싱긋싱긋 웃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소설에 없는 풋풋함과 약간의 허술함마저 보이기 때문입니다. 읽어보면 반드시 능숙한 소설만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고 풋풋하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마치 부분 부분이 반짝거리고 있는데 아직 맞춰지지 않은 퍼즐 같이 다만 형식 같은 게 갖춰지지 않았을 뿐 쉽게 쉽게 읽힙니다.
<굿바이, 콜럼버스>는 여름 한철에 벌어지는 가난한 유대인 대학생 남자의 풋사랑 이야기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남자 주인공은 컨트리클럽에서 우연히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 연애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려내는데 신분문제나 이런 거를 제쳐두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합니다. 남녀는 그 여름을 산책과 수영과 드라이브와 잠자리로 채웁니다. 재미있게 본 부분은 사랑을 나누기 전후의 농담과 장난들입니다. 이 둘은 서로 말에 함정을 파고 함정에 빠져주기도 하고 언어유희에 자조와 냉소를 섞습니다.
필립 로스는 참으로 여러 모습이 있는 작가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계 미국 작가지만 당시 유대계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유대인의 정체성 탐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유대계 이민자들이 미국의 중산층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또 어떻게 변해 갔는가를 지켜봅니다. 로스의 주인공들은 아메리칸드림과 물질적 성공의 혜택은 누리지만 결국은 미국 사회의 변화와 역사의 격랑 속에 휩쓸려 파멸한다는 플롯을 자주 다룹니다. 이 책은 특히 전미도서상을 안겨주기도 하고 영화로도 대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유대인의 시선에서 미국 유대인 사회의 민낯을 그려내며 여러 곳에서 호평을 받은 반면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P 60 : 도서관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어쩌다 거기에 가게 되었는지, 내가 왜 거기에 그대로 있는지 정말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대로 있었고, 시간이 지나자 그날이 오기를, 일층 남자 화장실로 담배를 피우러 들어가 거울에 연기를 내뿜으며 내 모습을 살피다가, 아침나절 어느 때부터인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매키나 스카펠로나 위니 여사처럼 내 피부 밑에도 피를 살과 분리하는 엷은 공기층이 생겼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날이 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게 되었다. 누가 스탬프를 찍는 동안 누가 거기에 펌프질로 공기를 넣은 것인데, 그러면 그때부터 인생은 글래디스 숙모처럼 내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브렌다처럼 모아 들이는 것도 아닌, 통통 튀기며 나아가는 것이 될 터였다. 마비 상태로 살아가게 될 터였다. 나는 그런 상황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어영부영 일에 시간을 쏟는 동안 점점, 소리 없이, 위니 여사가 <브래태니커>를 향해 조금씩 나아갔던 것처럼 그런 상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그녀의 빈 스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50년 이상 작가 생활을 해왔던 로스는 2010년 <네메시스>를 끝으로 절필 선언을 합니다. 그때 그는 “내가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닌지 보려고”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전부 다시 읽었다고 2014년 뉴욕 타임스 실린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결론 내린 그는 1960년부터 2013년까지 쓴 에세이와 논픽션 모음집 <왜 쓰는가?> (Why Write?)를 내고 일 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기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싫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책과 싸우고 책이 어떤 책인지 혹은 어떤 책이 아닌지 재발견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