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가

by 오르한 파묵

by 무무

어렸을 때는 책을 읽는 게 두려웠습니다. 작가가 의도한 이야기를 내가 과연 잘 이해하고 있는지,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뭐가 문제일까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나름의 해답을 준 것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순간들이 적어도 길을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게 하였고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읽으면 된다는 생각에 기쁨마저 들어서 행복했던 책입니다.


이 책은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입니다. 이 자리는 1926년부터 시작해서 1932년에는 T.S 앨리엇, 1967-68년에는 보르헤스, 1985-86년에는 이탈로 칼비노, 1992-93년에는 움베르토 에코 등 매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작가들만이 초청받는 찰스 엘리엇 노턴이라 명해지는 작가에게는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2008년 가을 오르한 파묵 또한 이 강연에 초청받아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과 소설가 그리고 독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총 여섯 차례의 강연을 통해 35년 동안 자신이 해온 글쓰기 여정을 털어놓은 강연이자 고백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소설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은 소박한 사람과 성찰적인 사람으로 구분을 합니다. 소박한 독자는 소설의 인위적인 측면을 인식하지 못한 채 흘러가는 대로, 몰입하여 읽는 부류를 의미하고 반면 성찰적인 독자는 소설의 텍스트가 갖고 있는 허위성을 인식하고 각 텍스트의 장치들이 가진 의미를 분석하며 읽는 독자를 말합니다. 이를 읽으며 과연 내가 어느 한쪽에 속하는지 생각을 하다가 전적으로 한쪽에만 속하는 독자는 없다는 얘기에 안심하며 더불어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나 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는 피하라는 얘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자 자신이 우리의 인생이 실제로 존재하는 지도 불확실한, 감춰진 의미를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소설에서 배웠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 대해 “중심부는커녕 이해할 만한 의미라도 찾을 희망이 없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미마저 느껴졌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순문학을 읽는 것은 세상의 중심부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는 말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그리고 책 읽기는 각 개인이 지나온 삶의 궤적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절절한 사랑 얘기로 읽히는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절대 권력에 반하는 투쟁이거나 시대의 흐름에 맥없이 휩쓸려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파묵이 소설의 중심부가 개인적인 역사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또 하나가 아니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각 개인이 찾아내는 중심부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심지어는 작가가 생각하고 배치해 놓은 중심부와 다르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위축될 필요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를 수밖에 없고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쭉 읽어나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P : 나의 진짜 고민은 소설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 그리고 소설가들이 어떻게 쓰고, 소설은 어떻게 쓰이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소설 독자로서의 경험과 소설가로서의 경험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소설들을 읽고, 그런 소설을 직접 써 보려고 애쓰면서 소설에 대해 가장 잘 배우게 됩니다.



몇몇 분들이 저에게 왜 소설을 읽는지 왜 책을 읽는지 왜 읽어야 하는지 물어보고는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떠오르는데 “실용서는 답을 가르쳐 주지만 문학은 질문을 던진다” 는 와닿게 다가옵니다. 이 책을 읽고 앞으로 이런 질문을 받으면 파묵처럼 인용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두 거장의 명언을 섞어, 문학이 던진 질문을 통해 세상의 중심부에 다가가려 노력 중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