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뉴욕
봉주르 뉴욕 - 프랑수아즈 사강 [학고재]
힘든 학교 생활들이 지나가고 어렵사리 구했던 직장이 익숙해지면서 일에만 매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퓨즈가 나가듯이 일상적인 제 삶이 산산조각 나는 거 같은 느낌이 들던 때에 이 책을 만났습니다. 그전까지 휴가를 낸다는 게 나태해지는 거라고 착각하던 저는 과감히 휴가를 냈고 최대한 얇은 책 한 권 만을 들고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고 고른 책이었습니다. 이주 정도 되는 나름 긴 휴가에 돌아온 뒤 잠시 민감하게 반응했던 주변 시선들과 낡은 관습에서 벗어났었고 이 책 한 권을 통해 즐겁게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여행 에세이입니다. 뉴욕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쿠바, 예루살렘을 여행한 느낌을 섬세하고 냉소적으로 자연과 고향, 애마를 열정적이고 고독하게 모는듯한 모습이 그녀의 문체처럼 파스텔 톤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그녀의 일기장이 궁금했던 차에 인간 사강의 민낯뿐만 아니라 속살까지 엿볼 수도 있습니다. 이십 대 밖에 되지 않은 그녀가 사물을 꿰뚫어 보고 있다은 사실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1955년, 뉴욕을 여행한 이듬해 그녀가 쓴 글이라고 하는데 2010년대에 제가 살고 있던 가을의 뉴욕이랑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뉴욕을 여행할 때와 달라진 것은 아마,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작아진 거 말고는 아마 없을 거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강은 언제나 같은 맥락의 책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며,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게 모르고 지나가는 사실들을, 대수로울 것 없는 소박한 문체로 냉혹하게 혹은 달콤하게 보여주는 그녀였습니다. 이 책은 조금 달랐습니다. 때로는 도피하고 때로는 부딪히기도 한 양극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의 이 전 책들이라면 이 책은 내려놓는 책이었습니다. 여전히 시니컬하지만 이 당시 여행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마냥 흥겨워하는 스무 살 이쁜 사람 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P 14 : 뉴욕은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탐욕스럽고 긴장된 도시다. 도시 어디에도 한가롭게 빈둥거리는 사람은 없다. 뉴욕에서는 숭배하는 신들이 있는데, 낮의 신은 질서와 군집 본능과 돈과 미래이며, 밤의 신 역시 돈과 술, 그리고 고독이다.
P 99 : 이탈리아는 외국이라기보다는 어릴 적 소꿉친구나 함께 장난칠 일을 꾸미는 공모자, 내지는 미로와 같은 길에서 처음으로 느꼈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두근거림이다. '이-탈-리'라는 약간 장난기 어린 이 세 음절이 상징하는 문화와 역사, 그가 지닌 비범한 힘과는 상관없이, 이탈리아, 그는 '대뜸' 불어오는 잠시 스쳐 지나가 버릴 사랑의 바람인 것이다.
저는 여행의 장점은 돌아올 곳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바뀐 생각은 떠나고 싶지 않은 여행지를 떠날 때 이런 마음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회만 되면 떠나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기며 어디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며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작가의 눈을 따라 상상하며 혼자 떠나는 여행은 더없이 자유롭고 편해서 현재 즐기기에 좋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