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 [들녘]
사람들마다 괴상한(?) 취미들이 있을 듯한데 저는 고백을 하자면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 역 기차표를 보는 일이 그러합니다. 책을 보고 감동을 받아 영화까지 봐서 두 작품 모두 좋아했는데 실제로 야간열차가 다니는지 궁금했었고 언젠가 가볼 수도 있는 기차역 시간표를 검색해보는 게 십 년이 남는 취미생활이 되었습니다. 여행을 못 다니는 요즘, 리스본 여행을 하고 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간열차를 타보는 걸 상상하게 됩니다. 눈을 감고 그곳의 붉은 지붕과 돌길, 그 위를 가로질러 느리게 가는 노란 트램과 멀리 보이는 바다가 일렁이는 모습에 그려집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늘 똑같이 반복되던 수업을 팽개치고 갑자기 리스본으로 향합니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인 주인공에게도 리스본의 공기는 아마 강렬했을 겁니다.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비 오는 어느 날 그는 자살을 시도하던 한 여성이 남긴 붉은 코트 속 책 한 권과 15분 후에 출발하는 리스본행 티켓을 들고, 그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프라우를 찾는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리스본이라는 낯선 도시에 도착한 주인공과 그가 찾는 책의 저자 아마데우의 행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인 이 책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아주 기묘한 여행기입니다.
책 한 권을 남기고 사라진 붉은 코트의 여성은 마치 리스본이라는 도시로 인도합니다. 낡은 숙소에 자리를 잡은 그는 매일 아마데우의 흔적을 찾기 위해 길을 고 분명 그는 현재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곳에서 맞닥뜨린 광경은 40여 년간 지속되어온 안토니오 살라자르의 독재정권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포르투갈의 민주화 운동 <카네이션 혁명>으로 오버랩됩니다.
주인공 그레고리는 젊은 혁명가 아마데우와 친구들의 행적을 따라 리스본 곳곳을 거닙니다. 지금은 거리의 예술가들이 즐비하고, 각종 레스토랑과 각종 쇼핑을 위한 상점이 자리 잡은 호시우 광장에서 코메르시우 광장에 이르는 길은 불과 몇십 년 전 젊은이들에게는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찾고자 했던 쟁취해야 할 장소이자 공공의 목표였던 곳이었습니다.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신념에 가득 찬 그때의 혁명가들이 거닐던 그곳에는 서로를 믿고 지지하던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고 그 관계가 만들어주는 낭만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하루를 무료하게 보내던 그레고리우스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된 현재에서 광장으로 오고 나서는 찾기 힘든 뜨거운 열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사고로 늘 끼던 두꺼운 안경 대신 가벼운 새 안경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익숙함에서의 탈피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리스본으로 온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안과의사 마리아나에게 데이트 신청 한 번 변변하게 못 하는 소극적인 남자였지만 결국 학교 교장의 계속되는 전화를 받지 않는 용기를 내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서서히 변해갑니다.
마지막 장면은 책도 좋았지만 영화도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우연에 이끌려 리스본까지 왔지만 이제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필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 기차역에 마중을 나온 안과의사 마리아나가 그를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그냥 여기 머물면 안 돼요?” 그레고리우스는 그 물음에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스포이게에 말하지 않겠습니다.
P 182 : 그의 의지가 멈추었기 때문에 시간이 멈추었고, 이 세상도 멈추어 섰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을 만큼 조용히...
1974년 4월 25일 새벽,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대위가 지휘하는 구국운동 MFA(Movimento das Forças Armadas)는 포르투갈의 민주화를 위해 시내 곳곳에 있는 광장을 점거했던 쿠데타입니다. 시민들은 집에 머무르라는 MFA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거리로 몰려나왔고 혁명군에게 붉은 카네이션을 선사했고 병사들은 그 꽃을 총구에 꽃아 감사를 표했습니다. 붉은 카네이션은 곧 비폭력을 뜻하는 상징물로 남았으며 이날은 <리스본의 봄>으로 불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