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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l 26. 2023

방랑자들

by 올가 토카르추크

직접 가 보지 못한 이국적인 장소들을 마음속으로 방문해 보고,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를 몸소 접하게 되며 지구촌 곳곳에서 여러 흥미로운 인물들과 그들의 생의 단면을 만날 수 있을 수 있을 거 같은 설렘이 가득한 여행이라는 특별한 단어를 좋아합니다. 자연스레 관련된 책들을 좋아하게 되면서 많은 책들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여행이라는 주제도 자유로워서 그런지 장르 또한 다양해, 일지나 르포르타주는 물론, 서간문이나 강연록 형식의 글 등등 여러 가지로 많습니다.   

   

서점에서 제가 좋아하는 이 작가의 책들을 찾다가 이 책의 원제목 <flights>와 작가의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던 기억이 납니다. 가벼운 여행기 정도로 생각했던 저는 몇 페이지를 읽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회자되는 여행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횡단하는 물리적인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았고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 묻어 두었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시도, 시련과 고통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이 방대한 여정 모두 작가가 정의하는 여행에 포함되더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여행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의 내밀한 이야기를 기록해 그들에게 불멸의 가치를 줍니다. 구성은 10여 개 문장으로 이뤄진 짧은 텍스트부터 중편소설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여행기 형식이지만, 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사색하도록 유도하는 철학적인 여행기입니다. 서점에서 처음 읽고 어디 여행 갈 때마다 읽는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P : 우리의 몸뚱이는 가엾고 추하다. 예외 없이 전부 가루로 으깨어질 운명을 타고났다.



처음에는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단절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전체를 다 읽어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여행객들이 끊임없이 서로 마주치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흡사합니다. 100여 편의 이야기에는 인체나 내장 기관을 전시한 박물관에 대한 관람 기록 같은 추리물도 있고, 오랜 시간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쓴 에세이도 있고, 바쁜 여정을 쪼개어 기차역에서 무릎 위에 책을 받쳐놓고 쪽지에 휘갈겨 쓴 단상도 있습니다. 트렁크에 담긴 구겨진 짐처럼 두서없고, 혼란스러운 형태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숨 쉴 겨를도 없이 나열됩니다.


신기했던 것은 뉴질랜드를 발견한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의 이야기에 이어 호주의 한 해변에서 길을 잃고 죽음을 맞은 고래의 사건을 언급하는 부분이었는데 전혀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 경계를 허무는 방랑자들처럼 형식의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P : 나는 서너 살이다.


P : 망가지고 손상되고 상처 나고 부서진 모든 것에 자꾸만 끌리는 것, 이것이 나의 증상이다.


P :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선, 면, 구체들,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제목은 고대 러시아 정교의 한 교파인 <달리는 신도들>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정체되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고 장소를 바꾸는 것만이 악을 쫓아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는 독자를 쉼 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여행이야말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머무는 공간,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소유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등이 삶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기 때문에 당장 가방을 싸서 어디라도 나가라고 등 떠미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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