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EP 02

휴식이 필요한 소녀

by 무무

새벽 첫 버스에 오를 때면 눈에 자주 들어오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어울리지 않게 교복을 입은 채 혼자 앉을 수 있는 좌석에 앉아 발을 길게 뻗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마주칠 때마다 귀에는 어김없이 이어폰을 꽂고 있었고, 무슨 음악을 듣는지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리는 그 친구는 정류장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걸어갔습니다. 새벽부터 나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는 생각에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렇게 열심히 해야만 하는 교육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루는 담배를 사려고 소녀와 함께 같은 정거장에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키가 좀 더 컸던 만큼 제가 앞지르게 되면서 먼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담배를 사서 밖으로 나와 담뱃불을 붙이고 테라스에 앉았습니다. 소녀도 삼각 김밥을 하나 사서 제 건너편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담배냄새 때문에 피해를 갈까 자리를 옮겼습니다. 일주일에 세네 번은 마주치는데 인사는 하고 싶었지만 나이 든 아저씨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리고 안면도 없는 사람이 어둠이 가득한 그 새벽에 말을 걸면 혹시라도 오해를 할까 봐 그냥 조용히 제 사소한 휴식을 마치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여느 사람들처럼 그저 모르는 사람으로 그저 이래저래 자주 마주치는 인연으로 끝이 날 뻔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한번 같은 정류장에서 내리게 되었고 저는 또 담배를, 소녀는 저번과 다르게 라면을 사 와서 테라스에 앉았습니다. 조심히 자신의 시간을 준비하는 그 소녀를 위해 다시 자리를 피해 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편의점 사장님이 삼각 김밥을 소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사장님도 저처럼 그 소녀가 궁금했는지 소녀에게 왜 이 시간에 학교를 가는지 물었습니다.



쉬고 싶어서요.



말문이 막혔다는 표현이 제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 학생은 어떤 삶을 견뎌내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의외이면서도 왜 그렇게 슬프게 들린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다시 담배를 꺼내게 되었고,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 테라스에 좀 더 오래 앉을 수 있게 평소 잘 찾지 않았던 뜨거운 커피를 사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용히 라면을 다 먹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조용히 학교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봤습니다.



그냥 뒷모습이라도 바라보며 지켜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소녀가 안 보이게 될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커피를 핑계 삼아 시선을 붙잡아 두었습니다. 별 거 아닐 수 있는 그 말 한마디는 저에게 하루 종일, 아니 며칠 동안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소녀의 사연을 제 마음대로 재단했을 수는 있지만 무심코 보았던 그 미소를 머릿속에 놓지 못하고 마음으로 새겨버렸기 때문에 지금도 드문드문 생각이 납니다. 남아있는 에너지가 바닥인 듯, 걸음걸이는 조금은 비틀비틀하며 눈도 자꾸 감길 것 같은 그 소녀가 가끔 제 머릿속에서 튀어나옵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지날 때는 소리도 좀 지르고, 고요한 교실로 들어가서는 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춤이라도 추면서 소녀가 말하는 휴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름도 모르는 학생아, 덕분에 외로운 어떤 한 사람을 쓸 수 있었어. 언젠가 내가 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너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어. 그리고 내가 마음대로 생각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행복한 일만 가득한 사람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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