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는 자신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치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너무 순조로운 여행은 나중에 글로 쓸만한 소재를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뭔지도 모르고 시킨 음식이 내가 먹을 수 없는 이상한 음식이라 그날 한 끼의 식사를 망했다면, 그 또한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글로 쓰면 된단다. 그런 훌륭한 이유로 김영하 작가는 메뉴 선정에 별다른 고민 없이 아무 음식이나 시킨다고 한다. 그는 정말 뼛속까지 작가인가 보다.
나도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우리 집에서는 나름 유명하다. 김영하 작가처럼 계획을 세우지 않은 여행에 뜻밖의 사건을 만나서 ‘어머 이런 일은 나중에 글로 써야 해!’하며 글감 모으기에 신경을 쫑긋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좋겠으나, 그냥 귀찮고 게으른 탓으로 그렇다. 귀차니즘은 취미나 취향이 전혀 다른 남편과 내가 유일하게 비슷한 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행을 가도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하루에 한 가지 정도 뭐라도 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남편은 방콕의 한 호텔을 잡아서 휴가 내내 놀고 자고 먹는 것이 올해 소망이었다. 호텔 지하가 쇼핑몰이랑 연결되어 온갖 식당이 다 있는데 그렇게 맛있는 게 많더라는 회사 동료의 여행 소감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남편은 나와 같이 꼭 방콕에 가서 어떤 여행지도 돌아다니지 말고 쇼핑몰과 호텔에서만 살자며 다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올해는 다른 일정과 겹쳐서 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사실 남편과 같이 가지 않는 혼자만의 이탈리아 여행을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부터 꿈꿔왔다. ‘토스카나의 태양 아래’라는 영화를 보자마자 결정한 여행계획이다. 지금도 내 노트북의 즐겨찾기에는 토스카나 지방의 와이너리 투어를 포함한 파스타 요리 수업 프로그램 등록 사이트가 남아있다. 이탈리아 중부지방에서 여름 한 달을 살아보고 싶어서 열심히 검색하는 중에 코로나가 터져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사실상 코로나의 종료를 알리던 뉴스가 나오던 날이었나... 나는 미국행 짐을 쌌고 비좁은 이코노미 클래스 의자에 앉아 무료함을 달랬다. 일주일의 즐거운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차를 넘나드는 장거리 여행은 이제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었는지 별다른 감흥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김영하 작가의 마음에 빙의된다. 여행지에서 좋거나 나쁘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맞닥뜨려도 괜찮겠지. 그렇지 않아도 글쓰기의 소재가 점점 궁해지는 이 시점에 글감을 채집해 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싶다. 부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재미난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번 여행에는 분명한 공식적인 이유가 있지만, 여행지에서 뜻밖의 즐거운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소재 삼아 조금이라도 흥미진진한 글을 써보는 것이 나에게 진정한 ‘여행의 이유’가 되기를 바란다. (2023.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