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경험에 의하면 미국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 가장 피곤하다. 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알아차리는 날이다. 보통은 이렇게 피곤한 채로 일주일쯤 지나면 서서히 몸이 적응한다. ‘일주일 지나면 한국 돌아가는데...’ 몸이 너무 힘들어지니 장거리 여행은 당분간 생각도 나지 않을 것 같다.
동네 유명한 맛집에 갔다. 여기는 링컨의 고향이라는 일리노이인데 텍사스 스타일의 바비큐를 팔고 있다. 맛집에 줄 서는 젊은이들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30분 정도 지나서 들어갔다.
미국 식당은 테이블에 종업원을 부르는 벨이 없다. 우리 테이블을 담당하는 종업원이 와서 인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드디어 우리 테이블 담당자가 왔다.
“안녕? 내가 오늘 너희 테이블을 돌보게 될 Jenny야. 만나서 반갑네? 충분히 시간을 줄 테니까 메뉴 생각해 보고 있어. 이따 다시 올게.”
대략 이런 내용을 (영어로!) 이야기하고 휙 가버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빠 보였다. 미국 식당의 종업원들은 테이블 구역을 몇 개로 나누어 관리한다. 자신이 맡은 테이블에서 나오는 팁이 중요한 수입원이기 때문에, 좋은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테이블 관리를 친절하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주문할 준비 됐어요.”
조금 지나 Jenny가 다시 우리 테이블로 오길래 나는 이야기를 붙여보았다. 우리 테이블을 돌보겠다던 Jenny는 “잠깐만!” 하더니 옆 테이블에 가서 재빨리 계산을 해주고 다시 온다.
“쟤 뭐냐, 우리 테이블을 잘 돌보겠다더니, 내가 불러도 다른 테이블 먼저 가잖아.”
“엄마가 주문할 준비가 된 것보다 Jenny가 주문받을 준비가 된 것이 더 중요해. 걔가 와서 너 주문할 준비 됐냐고 ‘먼저’ 물어보면 그때 주문하면 되지. 한국이랑 다르잖아, 미국을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아들이 놀린다. 잠깐 잊었다. 잠시 후 다시 우리 곁에 온 Jenny는 사람마다 뭘 주문하는지를 상세하게 물으며 주문받은 후 뭐가 또 필요한 거 있는지 다시 묻고 나서야 “이따 다시 올게”라고 말하며 명랑한 모습으로 다른 테이블의 안부를 물으러 갔다.
한국에서 식당에 가서 앉아있으면 종업원이 와서 바로 주문을 받아주기도 하고, 종업원이 오지 않으면 벨을 눌러 부른다. 벨이 없는 식당이라면 손을 들면 누구라도 바로 와준다. 하지만 이곳은 바로 주문을 받지도 않고 아무 종업원이나 부르는 것도 실례가 된다. 자기 구역이 확실하기도 하지만, 종업원을 내 편의를 위해 무조건 부르지 말라는 암묵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테이블 담당 종업원이 바로 오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지나가는 종업원 아무나를 부르게 되면 굉장히 난감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팁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명확해야 하는 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주문받으러 빨리 오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왜 안 오나?’ 하고 의아할 수 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빨리빨리’ 정서가 종업원을 재촉하게 만들기 때문에 식사를 천천히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그들의 식당 문화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들은 자기가 관리하는 테이블에 앉은 손님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잘 제공하고, 손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대가로 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식당 종업원들 누구에게나 뭐든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손님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와 잘 맞지 않는다.
우리 동네에 조금 비싸기는 해도 음식 맛이 훌륭해서 가끔 가는 식당이 있었다. 주문은 종업원이 받지만, 서빙 로봇이 있어서 음식을 테이블로 나르는 일을 로봇이 한다. 어느 날 보니 내가 주문한 음식을 나르는 로봇에게 ‘경자’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았다. ‘경자 씨가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라는 것인가?’ 다른 날 또 그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켰더니 이번에는 ‘경순’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서빙 로봇이 내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서빙 로봇에 성별이 있다. 그 식당은 ‘경’ 자 돌림의 이름을 가진 여성 서빙 로봇이 서빙한다. 굉장히 성차별적이고 직업 차별적이라고 생각했다.
식당에 머무르는 시간이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손님을 대하는 것은 서빙 로봇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서빙 로봇은 주문받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기계이다. 서빙 로봇은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내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지, 식사하는데 무슨 불편한 점은 없는지도 관심이 없다. 미국의 식당에서 서빙 로봇을 도입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나라에서 활약하는 서빙 로봇과 같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과한 팁 문화에도 불구하고 가끔 미국 식당에 가서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아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202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