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집을 떠났던 내 친구는 자기 엄마의 살림이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응, 원래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었어. 우리 엄마.”
좀 더 긴 시간을 엄마와 살았던 동생은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 친구는 엄마 집에 갈 때마다 도저히 정리할 수 없는 살림살이들을 몰래 가져와 집에 와서 버린다. 내 엄마는 어땠나 생각해 보면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나도 엄마 집에 가면 접시 뒤꽁무니에 붙어있는 오래된 얼룩을 닦고, 쓸데없이 쌓여가는 물건들을 잔소리와 함께 정리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도대체 왜 치우고 버리질 않는 걸까?’ 살림의 습관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그 무렵의 다른 집들이 그렇듯이 아이들은 많고 살림은 빠듯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집을 마련하신 내 부모님의 나이를 헤아려 보니 정말 대단하다. 공동주택이 많지 않았던 그 시대는 한 집을 여러 가구가 나누어 쓰는 것이 보편적인 주거 형태였다. 우리 집도 남는 방을 빌려주어서 집이 늘 북적거렸던 기억이 난다. 세를 준 집주인이나 세 들어 사는 집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풍요롭지 않던 시절이니 먹고사는 것이 비슷했다. 엄마들이 서로 아이를 봐주고 음식을 나누는 것도 똑같았다. 하지만 집 안팎을 건사하는 살림의 방법은 엄마마다 달랐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살림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는데 딱 필요한 만큼의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해야 할 집안일의 개수가 많다 보니 한 가지를 대충대충 하고 빨리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부엌의 그릇과 냄비들은 딱 필요한 만큼 씻어지고 정리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반짝거리지는 않았으며, 청소와 정리 또한 비슷한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다지 정돈되어 보이지 않은 우리 집의 모습은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만 싶던 20대 시절의 나에게 특별한 인상으로 남아있지 않다. 비싸지 않은 살림살이라도 반들반들하게 정돈되어 있으면 매일이 비슷한 하루였어도 엄마의 기분이 조금은 더 활기차고 명랑하지 않았을까? 살림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엄마는 내가 집에서 해야 하는 그런 사소한(?) 일들 말고 바깥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부모는 자식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기 원하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좋은 것이란 부모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는 자녀들과 해외여행을 다니지만, 정작 아이는 동네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가장 소중하게 남아있는 것처럼. 비좁더라도 깨끗하게 정돈된 집, 아이들에게 계절마다 새 옷을 사줄 수는 없지만, 낡은 옷이라 해도 항상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히고, 비싸지 않은 식재료를 사용해도 푸짐하고 정성이 가득한 음식이 있는 집이라면 누구라도 어린 시절 부모와 살았던 기억을 굉장하게 여길 것이다. 각자의 모습으로 정돈된 삶의 습관이 배어있는 가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