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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정 Nov 25. 2020

내가 먼저 차려고 했는데...

휴직 눈치게임 시작!


항우울제 중 용량이 적은 것을 뺐다. 지난주에는 아침 약을 아예 뺐는데, 또 약을 줄이게 돼서 기쁘다. 10월 말 갑자기 휴직선언을 지른 이후 기분은 치솟는 코스피(요즘은 좀 떨어지나요?), 나스닥 마냥 상한가이다. 12월까지 근무하고 1월부터 휴직을 하겠다고 바로 질렀다. 굳이 두달 후 휴직을 하겠다고 한 것은 12월까지는 나의 남은 업무들을 처리하고 인수인계도 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내가 말을 꺼내자 마자 본부장은 내게 힘들면 당장이라도 쉬는 게 맞다며 마치 나의 휴직 선언을 기다린 사람처럼 반색을 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그가 갑자기 나를 부르길래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면담을 했는데, 나보고 다른 팀으로 갈 걸 권유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이제 주1회만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나머지 4일은 재택근무만 하라고 했다. 순간 머릿 속이 복잡했다. 겉으로는 나를 생각해 주는 척 하지만 사실상 이제 내가 필요 없다는 제스처로 느껴졌다. 이건 마치 내가 차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먼저 차인 기분이랄까? 


부서를 옮기게 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지금 부서로 발령되고 떠나야 될 사람이 안 떠나서 이틀은 자리도 없었고, 그 흔한 환영 회식 한번 한적이 없었고, 기껏 일다운 일 좀 해보나 싶었는데 코로나로 줄줄이 해야할 일은 사라지고, 그래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내가 느끼기에 일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대충한 결과였다. 그가 내게 아마도 원했을 창의적인 새 프로젝트를 나는 기획할 의지가 없었다. 기획할 만한 경험도 능력도 없었다(아, 능력 없단건 취소. 난 유능하니깐).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이것 저것 미끼를 던졌다. 내 능력을 시험하려는 듯 했다. 당연히 나는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무기력증과 불안이 다시 찾아왔고, 우울증 치료 중에 갑작스런 환경 변화가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막 살았다. 아니, 막 살지 않고는 죽을 것 같았다. 솔직히 출근 하는 게 기적이었다. 매일 지각하고, 태업을 했다. 본부장은 그것에 대해 어느 날은 부드럽게 타이르고, 어느 날은 불같이 화를 냈다. 무슨 방법을 쓰든 결과물의 질은 달라지지 않을텐데.


무얼 위해 치료를 받나요? 


다니던 정신과를 옮긴 후 첫번째인가 두번째 면담 중에 선생님이 저런 질문을 하셨다. 궁극적으로는 무얼 위해 사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한 대답은 "행복해 지고 싶어서요." 였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 그래야만 한다. 내가 나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상처 입고 힘들다는 것을 모른다. 그날 진료실을 나와서 바로 인사팀에 휴직 의사를 전했다. 며칠 뒤 총무팀장과 면담을 해서 내가 느끼는 불만을 솔직히 이야기 했다. 나한테 무슨 일을 기대하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할일이 없는 것 같다고. 그리고 본부장은 기분이 오락가락 해서 자기 기분에 따라 같은 결과에도 반응이 천차만별인 것 같아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 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직원들한테 부드러움을 가장하고, 뒤에서 막말하는 것까지.


인사팀에서는 내가 이미 한번 휴직 했던 상황이 있고, 정신과 약 복용을 이어가고 있는 등 증상이 개선되지 않은 것을 참작하여 휴직 신청을 받아들였다. 1월부터 휴직하겠다는 의사를 존중해준다고 했고, 12월께에 진단서를 제출하면 결재 올리겠다고 했다. 근데 갑자기 나보고 다른팀에 가라니? 나는 이제 휴직할건데.. 인사 이동을 얘기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요..? 그런데 더 황당하게도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누가 올 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처음부터 나는 점심도 같이 안 먹고, 주 1회 외부에서 먹는 점심 회식도 안 가고 겉돌기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나.


황당하긴 하지만, 내가 차려고 했는데 차여서 조금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나도 걔 맘에 안 들었으니까. 서로 마음에 안 드니 이쯤에서 험한 꼴 보지 않고 아름답게 헤어지는 게 우리를 위해 좋은 거지. 이렇게 써놓고보니 내가 잘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애초에 맞지 않는 결합이었던 것이다. 부서 이동을 희망하는지 의사도 묻지 않고 인사를 개판을 쳐놨으니 서로 여기저기서 일 못 하겠다고 들고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 부서를 옮기는데 괜찮냐고 옮기기 전에 형식적으로라도 의사를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선택지가 있다면 당연히 싫다고 했을 것이다. 


뭐 이제는 더이상 미련도 없다. 그래서 요즘 난 주 1회 사무실 출근, 주4일 재택근무 체재다. 그래도 맡은 책임은 다 하려고 노트북 켜놓고 이메일도 사부작 사부작 날리고, 일 열심히 하고 있다. 사실 내일쯤엔 출근해서 밀린 우편 발송 작업도 하려고 했다. "ㅇㅇㅇ 과장 보내면 난 그 사람 주5일 재택근무 시키고, 아무 일도 안 시킬거에요." 본부장님이 직접 하셨던 말씀인데, 어디서 많이 듣던 내 얘기다. 주 4일 재택근무에 아무런 업무 지시 없음. 거기다 원래 이동 시즌이 아닌데 12월 1일에 갑자기 인사 이동까지 시킨다고? 떠날 사람이니까 일 안 시키는거 빼박이네 이거. 그래서 내일부턴 코로나 시대에 걸맞는 재택근무를 즐길 작정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차이긴 했지만 문자통보는 아니어서. 지금은 미리 짐이라도 챙겨놓을 수 있잖아. 우리 서로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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