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프랑수아즈 사강과 더불어 대학교 1,2학년 시절 내가 늘 옆에 끼고 다니던 책이 바로 전혜린의 에세이였다. '생'그 자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당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처음 고민하던 내게 많은 귀감이 되었고, 그 시절 나라는 사람의 정서가 되었다. 또 같은 문학을 전공하는 문학도로써 이 여자의 삶을 곧 나의 삶과 동일시 하며 평범을 거부하고 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은연중에 나 자신에게 계속 암시를 걸어왔던 것 같다.
기분 전환 부산 여행을 갔다가 헌책방 골목에서 입구에 민음사 문학 전집이 있는 어떤 서점에 들어갔다. 뜨내기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내가 들어가든 말든 사장님은 신경도 쓰지 않으시고 책을 정리하고 계셨다. 처음에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 초판본 같은 걸 구하고 싶었는데, 한참 책꽂이를 쳐다봐도 박완서는 없었다. 그런데 순간 책꽂이 높은 곳에 전혜린의 에세이집이 눈에 띄었다. 꺼내달라고 말할지 말지를 계속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저 책을 달라고 하자 사장님이 반갑게 "전혜린을 찾는거였어? 그럼 말을 하지." 라고 하시면서 창고에서 절판된 에세이집까지 두권을 갖다 주셨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아니 대학교 2학년때 이후로 처음 읽는 전혜린 이었다.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열심히 읽다가 나중에는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까지 찾아 읽게 되었다. 둘 다 전혜린이 번역한 책인데 <데미안>은 부산의 큰 서점이란 서점을 다 뒤졌는데도 전혜린이 번역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품어왔던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에 어느정도 답을 찾은 지금은 전혜린을 다시 읽는 다는 것이 마치 탐험이나 시간여행의 일부처럼 느껴져서 더더욱 열심히 그 사람이 남긴 것들을 찾아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당연하게도 모든 책에서 예전과 같은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우선 <데미안>은 에바 부인에 대한 싱클레어의 집착, 결국 이상이 모성으로 귀결된다는 은유가 불쾌했다. 그리고 내가 발붙이고 있는 현재가 아닌 아프락사스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게 하나도 와닿지가 않았다. <생의 한가운데>는 뭐만 하면 다 자기 뜻대로 되는 주인공에게 하나도 공감이 가지 않았다. 치명적인 팜므파탈이면서도 천재이고 쓰기만 하면 뭐든 베스트셀러가 되는 사람. 여성이 많은 한계를 갖던 시절 아무런 현실의 제약도 받지 않고 하고싶은 대로 하는 주인공. 나도 처음에는 이런 주인공을 동경했었던 것 같다. 두 소설 모두 전혜린과 닮아있다.
전혜린은 글을 쓰는 것, 문학을 공부하는 것을 자신의 천명처럼 여겼고, 생활하는 가운데에서도 닳아 없어지지 않는 스스로를 찾아내서 지키길 원했다. 그게 그 사람이 그렇게 집착하던 '생'의 실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생의 한가운데>의 니나처럼 전혜린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모든 역할을 거부하고, 문학을 공부하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가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죽음에 잠식돼 버린다.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생활'은 그 사람에게 곧 '평범'이었고, 자신은 평범해지는 순간 끝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생의 한가운데>의 니나처럼 빛나는 재능이, 천재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혜린,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 애쓰며 살았던 걸까? 어느덧 전혜린이 죽은 나이가 돼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찾아내려 애쓰던 '생'이 사실은 허구에 불과했음을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던 빛나는 천재성도, 그 시대에 특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상황이 참작된 것이지 결코 그 스스로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전혜린은 더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다시 전혜린을 읽으니 그런 번민이 많이 느껴진다. 전혜린 자신은 니나가 아니었다. 사실은 누구도 니나는 될 수 없는데 말이다.
이제 죽을 것인가, 비약을 통해서 문제를 모면할 것인가, 아니면 제 분수에 맞는 관념과 형상들의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부조리의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해나갈것인가?(...) 방법이란 바로 고집스럽게 버티는 것이다.(...)인생에 의미가 없으면 없을 수록 그만큼 더 훌륭히 살아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 죽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반항에는 희망이 없다.(...)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 p.81-85,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16
전혜린과 같은 고민을 하던 시절, 내게 전혜린은 우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시 전혜린을 펼쳐보니, 이젠 그냥 캐캐묵은 과거, 헌 책과 같은 느낌이다. 요즘의 나는 사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고 느낀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현실의 괴로움을 도피하려는 마음이다. 실제로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했을 때는 내가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또 찾아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현실은 괴로울 수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피할 수 없다면 당하는 수 밖에.
누군가와 비교하여 적어도 저 사람보다 나으니까 됐다, 이런 생각도 사치다. 그냥 그 순간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워 몸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몸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하염없이 걷거나 운동을 하면서 나를 단련하기도 한다. 떠오르는 생각을 노래하거나 글로 쓰면서 마음을 정리한다. 그래도 너무 슬프면,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