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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정 May 09. 2022

클럽에서 회식해 본 게 자랑

300명 규모 국제 행사 프로젝트를 끝낸 뒤 팀장과는 유대감이 급격히 쌓였다. 업무적으로 인정 받는 것 같아서 그땐 뭣도 모르고 좋아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가스라이팅이구나 싶다. 실제로 같은 실수라도 혼이 덜 났다. 그냥 관성적으로 하는 건데도 칭찬을 받을때가 많았다. 아마도 내가 쥐어짜면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작은 실수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기로 한 거겠지. 그 즈음에 통역사 분과 팀장 사이에도 엄청 유대감이 생겼는데 이말인 즉슨 회식이 잦았다는 뜻이다.


세상에 미친 회식 많고 많지만 나만큼 미친 회식 해 본 사람이 또 있을까. 오늘은 회식 얘길 좀 해볼까 한다. 일단 미친 회식이 다 그렇듯 날짜가 잡힌 게 아니다. 그냥 눈치껏 남아있으면 "다정씨 약속 없어? 저녁 먹고 갈래?" 가 되는 것이다. 약속은 물론 있어도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업무를 빙자해서 주말에 만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절대 저러지 않겠지만 저땐 팀장이 주도하는 그 작은 사회 안에서 소외 되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유대관계 따위 돌아서면 정말 습자지 만도 못하다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엔 그게 중요했다. 거기 껴야 돼서 약속 당일 취소도 참 많이 했다. 이때 많은 인간관계들이 단절되고 사라졌었다.


팀장님과 뭐하고 놀았냐고요? 우선.. 첫번째는 쇼핑 이었다.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고 돈도 없고 당연히 옷도 별로 없었다. 화장도, 악세사리도, 지금도 안 하지만 그때도 안했다. 지금은 사고 싶은 거라도 맘껏 사긴 하는데 그땐 그럴 여유도 사실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쇼핑하는 팀장의 옷이나 악세사리를 골라주고 어울린다고 해 주는 일, 간단하게 말해서 '시녀'였다. 가끔 나도 작은 거 정도 하나 사기도 해야했다. 너무 암것도 안 사면 그 스쿼드에 눈치 보이잖아.


가끔 점심 때 백화점 가자고 하고 그때마다 같이 쇼핑 하러 가는 것도 솔직히 어이 없는데 퇴근하고도 같이 쇼핑이라니... 나도 정상은 아니었던거 같다. 거기에 왜 끼고 싶어했던건지 진심 나도 궁금하다. 이게 가스라이팅이지 진짜 다른 게 아니구나.


하루종일 붙어 있는 것도 화나는데, 뭔가 나도 그들과 개인적으로도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휩쓸렸던 것 같다. 이것도 벌써 10년이 다 된 이야기라 요즘엔 이런거 대놓고 부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상사들이 이런 시녀짓을 내심 좋아한다는거? 이제는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사회여서 대놓고 표현을 못할 뿐이지. 하긴 시녀들이 쇼핑 하는거 도와주고 골라주고 좋은 말만 해주는데 싫을리가 없지(물론 난 싫음).


쇼핑을 충분히 하면 이따금 클럽에 갈 때가 있었다. 2차 정도 마시다가, 급 춤추고 싶다고.. 풉... 예... 진짜  "춤추고 싶다" 정확히 저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같이 춤을 추고 놀았답니다? 그렇게 뭐 한 새벽 2-3시까지 놀다가 들어가면 현타가 몰려오곤 했다. 그런데도 거기에 계속 끼고 싶었다. 세명인데 그 중 둘이 좋다고 깐부 맺으면 나만 깍두기잖아. 깍두기는 게임에 안 끼워준다고. 그래서 재밌었냐고? 아니 전혀요. 그저 이렇게 먼 훗날, 아이고. 그때 진짜 어이없었지. 하고 마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을 뿐이랍니다.


그때 이태원에 있는 거의 모든 술집에 대부분 다 가 본 것 같다. 홍대, 합정 쪽도 뭐 솔찬히.... 덕분에 클럽 한번도 못 가 본 문찐 신세는 면했으니 다행인걸까? 감사해야 하는걸까? 대부분 둘이 먼저 놀다가 좋은 곳을 발견하면 그 다음에 나를 껴주는 그런 식이었는데, 묘하게 나랑은 좀 구린 곳 가고 진짜 좋은 곳은 지들끼리 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기분 탓이겠죠. 예... 그때 이래저래 어울린다고 술 잘 마시는 척 술부심 부리다가 완전 꽐라 돼서, 지하철에서 비싼 가방에 토하기도 하고 뭐 부려볼 수 있는 진상의 끝을 다 본거 같다.


그렇게 쌓은 유대감은 내가 부서를 옮기자마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는 척 했던 모든 말들이 다 가스라이팅이었던 것이다. 이후에 내가 많이 힘들었던 시기에 그들은 나를 위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겉으로만 공감하는 척 할 뿐이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데 '필요' 나 '효용 가치' 같은 것도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자신에게 필요할 때만 무차별적으로 이용하고, 이용 할 데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버리는 그런 관계도 있구나.


이때의 영향으로 나는 밥도 맨날 혼자 먹고 커피도 혼자 마시고 산책도 혼자하는 자발적 웃사이더 되었다. 그래도 이후에 다른 부서에서 진심으로 잘해주는 사람도 존재하긴 한다는  알게 되긴 했지만 아주  훗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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