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명 규모 국제 행사 프로젝트를 끝낸 뒤 팀장과는 유대감이 급격히 쌓였다. 업무적으로 인정 받는 것 같아서 그땐 뭣도 모르고 좋아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가스라이팅이구나 싶다. 실제로 같은 실수라도 혼이 덜 났다. 그냥 관성적으로 하는 건데도 칭찬을 받을때가 많았다. 아마도 내가 쥐어짜면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작은 실수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기로 한 거겠지. 그 즈음에 통역사 분과 팀장 사이에도 엄청 유대감이 생겼는데 이말인 즉슨 회식이 잦았다는 뜻이다.
세상에 미친 회식 많고 많지만 나만큼 미친 회식 해 본 사람이 또 있을까. 오늘은 회식 얘길 좀 해볼까 한다. 일단 미친 회식이 다 그렇듯 날짜가 잡힌 게 아니다. 그냥 눈치껏 남아있으면 "다정씨 약속 없어? 저녁 먹고 갈래?" 가 되는 것이다. 약속은 물론 있어도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업무를 빙자해서 주말에 만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절대 저러지 않겠지만 저땐 팀장이 주도하는 그 작은 사회 안에서 소외 되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유대관계 따위 돌아서면 정말 습자지 만도 못하다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엔 그게 중요했다. 거기 껴야 돼서 약속 당일 취소도 참 많이 했다. 이때 많은 인간관계들이 단절되고 사라졌었다.
팀장님과 뭐하고 놀았냐고요? 우선.. 첫번째는 쇼핑 이었다.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고 돈도 없고 당연히 옷도 별로 없었다. 화장도, 악세사리도, 지금도 안 하지만 그때도 안했다. 지금은 사고 싶은 거라도 맘껏 사긴 하는데 그땐 그럴 여유도 사실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쇼핑하는 팀장의 옷이나 악세사리를 골라주고 어울린다고 해 주는 일, 간단하게 말해서 '시녀'였다. 가끔 나도 작은 거 정도 하나 사기도 해야했다. 너무 암것도 안 사면 그 스쿼드에 눈치 보이잖아.
가끔 점심 때 백화점 가자고 하고 그때마다 같이 쇼핑 하러 가는 것도 솔직히 어이 없는데 퇴근하고도 같이 쇼핑이라니... 나도 정상은 아니었던거 같다. 거기에 왜 끼고 싶어했던건지 진심 나도 궁금하다. 이게 가스라이팅이지 진짜 다른 게 아니구나.
하루종일 붙어 있는 것도 화나는데, 뭔가 나도 그들과 개인적으로도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휩쓸렸던 것 같다. 이것도 벌써 10년이 다 된 이야기라 요즘엔 이런거 대놓고 부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상사들이 이런 시녀짓을 내심 좋아한다는거? 이제는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사회여서 대놓고 표현을 못할 뿐이지. 하긴 시녀들이 쇼핑 하는거 도와주고 골라주고 좋은 말만 해주는데 싫을리가 없지(물론 난 싫음).
쇼핑을 충분히 하면 이따금 클럽에 갈 때가 있었다. 2차 정도 마시다가, 급 춤추고 싶다고.. 풉... 예... 진짜 "춤추고 싶다" 정확히 저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같이 춤을 추고 놀았답니다? 그렇게 뭐 한 새벽 2-3시까지 놀다가 들어가면 현타가 몰려오곤 했다. 그런데도 거기에 계속 끼고 싶었다. 세명인데 그 중 둘이 좋다고 깐부 맺으면 나만 깍두기잖아. 깍두기는 게임에 안 끼워준다고. 그래서 재밌었냐고? 아니 전혀요. 그저 이렇게 먼 훗날, 아이고. 그때 진짜 어이없었지. 하고 마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을 뿐이랍니다.
그때 이태원에 있는 거의 모든 술집에 대부분 다 가 본 것 같다. 홍대, 합정 쪽도 뭐 솔찬히.... 덕분에 클럽 한번도 못 가 본 문찐 신세는 면했으니 다행인걸까? 감사해야 하는걸까? 대부분 둘이 먼저 놀다가 좋은 곳을 발견하면 그 다음에 나를 껴주는 그런 식이었는데, 묘하게 나랑은 좀 구린 곳 가고 진짜 좋은 곳은 지들끼리 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기분 탓이겠죠. 예... 그때 이래저래 어울린다고 술 잘 마시는 척 술부심 부리다가 완전 꽐라 돼서, 지하철에서 비싼 가방에 토하기도 하고 뭐 부려볼 수 있는 진상의 끝을 다 본거 같다.
그렇게 쌓은 유대감은 내가 부서를 옮기자마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는 척 했던 모든 말들이 다 가스라이팅이었던 것이다. 이후에 내가 많이 힘들었던 시기에 그들은 나를 위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겉으로만 공감하는 척 할 뿐이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데 '필요' 나 '효용 가치' 같은 것도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자신에게 필요할 때만 무차별적으로 이용하고, 이용 할 데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버리는 그런 관계도 있구나.
이때의 영향으로 나는 밥도 맨날 혼자 먹고 커피도 혼자 마시고 산책도 혼자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래도 이후에 다른 부서에서 진심으로 잘해주는 사람도 존재하긴 한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