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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린 Dec 26. 2023

나라고 미지근하고 싶은 건 아닌데

한 때는 나도 덕후였는데 말이지   

예전에는 뭔가에 푹 빠져 있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남들은 잘 모르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같이, 자신만의 관심사를 좁고 깊게 파는 그들을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오타쿠라 불렀다. 그때만 해도 오타쿠는 별난 사람에 대한 비웃음과 비아냥의 뉘앙스가 진하게 배어 있는 부정적인 단어였다.      


어느 순간부터, 오타쿠는 덕후라는 말로 바뀌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한정되지 않고 무슨 분야든지 애정을 가지고 깊게 파는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 됐다. 이제는 스스로를 덕후라고 지칭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졌고, 관심을 가진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루거나, 덕질 대상을 만나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을 성공한 덕후라는 뜻으로 성덕이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요즘은 뭔가에 푹 빠져서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을 한편으로 대단하다고 여긴다. 이제는 디깅이라는 이름의 트렌드가 되어 누구나 다 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인식의 방향이 바람직하다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 오히려 나 스스로는 시대의 흐름이나 트렌드에 역행하고 있는 것 같아 조바심이 들었다.           

한 때는 내게도 푹 빠진 뭔가가 있었다. 10대에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J-POP 그리고 라디오에 꽂혀 있었다. PMP에서는 파일공유사이트인 토렌트에서 다운로드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재생되었고, 이어폰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OST과 J-POP이 흘러나왔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직전이라, 일본 애니메이션과 J-POP은 암암리에 불법복제로만 접할 수 있는 그들만의 서브컬처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 점이 질풍노고의 중2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겠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복면가왕 판정단에서 아저씨라 불리지만 한 때는 오빠였던 그 세대 가수들의 노래와 이야기를 공테이프에 녹음하고. 때로는 메모하면서 하루라도 안 들으면 큰 일 날 것처럼 굴기도 했었다. 지금도 집에는 그 시절 테이프와 CD가 고이 모셔져 있다.       


덕후를 배척하던 세상은 달라졌다. 이제는 뭔가를 열심히 파지 않으면 오히려 라이트나 꿔보*라 불리면서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나 취향도 열정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세상을 덕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왜 한 때 충만했던 덕후기질은 점점 빠져나가는 건지. 점점 불안해지고 서글퍼졌다. 나라고 미지근하고 싶은 건 아닌데 말이다. (꿔보 - 꿔다 놓은 보릿자루)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 관심사에 깊게 파고 들어가 보려 애쓰기도 했다. 여러 시도 끝에 알게 된 건, 억지로는 무언가에 빠질 수는 없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그건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려는 시도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잘 생긴 아이돌을 보고 있어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고 있어도 예전처럼 가슴 뛰고 눈을 떠도 감아도 생각나는 감흥이 솟지 않았다.      


뒤늦게 뜨거운 덕심을 발휘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 단순히 나이 탓이라고 할 수도 없고. 바쁘게 갓생을 사는 사람들도 덕질을 하는 걸 보면, 지금의 현생에 치여서 그렇다고 변명할 수도 없고. 입맛이 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 스스로가 무언가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사그라들어 그저 무덤덤한 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조심스레 뭔가 미친 듯이 좋은 게 없어서 고민이라고, 여전히 20대인 후배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취미생활을 빡세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은 하는데, 자꾸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아서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오히려 자신은 좀 더 무덤덤해졌으면 한다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후배가 부러웠다. 마음대로 조절이 된다면 그게 어찌 사랑이겠으며, 애정일까. 


문득문득 솟구치는 서글픔은 단순히 트렌드에 뒤처진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한 때 들끓었던, 하지만 지금은 내 안에서 고갈되어 버린 사랑과 애정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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