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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린 Dec 22. 2023

함부로 친절하지 않겠다는 결심

어쩌면 그저 후배 복이 없었던 걸지도

누구나 친절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명제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건 사무실에 후배라는 존재가 생겨날 무렵이었다.      


첫 번째 후배는 나이와 경력은 나보다 2~3년 적지만, 입사는 몇 개월 빠른 후배였다. 그녀는 내게 친절하게 굴면 사람을 호구로 본다는 걸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먼저 입사한 사람이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배려하면서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자 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없는 입사날짜를 앞세워서 무슨 일이든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음을 사사건건 증명하려 들었다. 뭔가를 해보려고 할 때마다 따라오는 말은 이거였다.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고요,” 조직개편으로 후배와 헤어지고 나서, 사무실 내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두 번째 후배는 반대로 나이와 경력은 1년 정도 많지만, 입사가 1년 정도 늦은 후배였다. 나이 많은 후배는 처음이라 언니라 존대하며, 이것저것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자신보다 어린 선배를 시기했던 것일까. 팀장의 관심이 고파서였을까. 갖은 핑계로 팀장과 둘이서 수시로 외근을 같이 다니는 시간이 늘어갔고, 그에 비례해서 나를 바라보는 팀장의 눈빛은 싸늘해졌다. 온갖 궂은일은 내 몫이 됐고, 팀장의 비난 섞인 지적이 이어졌다. 견디다 못해 2년을 버텨 얻어낸 정규직 전환을 3개월 만에 포기하고 퇴사를 결정할 정도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내 후임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도 똑같이 팀장에게 뒷담화하고 이간질하다가 들통 나서, 결국 본인도 쫓기듯 떠났다고만 전해 들었다.      


세 번째 후배는 나보다 12살이나 어린 띠동갑 후배였다. 경력이라고는 6개월이 전부인 신입이나 마찬가지인 후배였다. 처음 2번은 경력직이라 그랬겠지, 설마 신입이 또 그러겠어라는 안이한 마음으로 친절한 선배 노릇을 하고야 말았다. 처음 1년에는 고마워하며 그럭저럭 버티더니, 어느 정도 업무가 손에 익었다고 생각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기획을 잡고 최종결과물 수정까지 봐준 일을 온전히 스스로 해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슬슬 같은 매니저끼리 이래라저래라 시킨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어느 날은 팀장이 후배와 같이 하라고 던져준 일을 분배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팀장님이 시킨 일인데 왜 저한테 넘기세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어이없는 반격은 바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팀장의 귀에 바로 꽂혔고, 팀장은 메신저로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 “쟤 어떻게 해줄까. 당장 가서 조져줄까, 아님 타 팀으로 보내버릴까.” 결국 그녀는 타 팀으로 발령이 났고, 얼마 되지 않아 퇴사했다.      


네 번째 후배는 역시나 12살 어린 띠동갑 후배로, 2년 정도 경력이 있는 후배였다. 면접 때는 나름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이기에, 설마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기대를 가져보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기대를 접어야 했다. 그녀에게 친절과 배려는 나이 많은 선배의 당연한 의무였을 뿐이었다. 선배의 의무로 둔갑한 친절이 후배의 권리가 되자, 결국 난 점차 업무를 분리하며 관심을 끊고 말았다.        


누구나 친절한 사람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친절한 선배는 우습게 본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후배들에게는 함부로 친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떤 배려도, 어떤 조언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권리나 귀찮은 잔소리일 뿐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한편으로,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그 나이와 연차가 되었으면 그 정도 퍼포먼스는 당연히 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선배들을 이리저리 재보던 과거의 나를 분명히 기억한다. 나이와 연차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붙지만, 실력은 시간에 비례해 붙는 게 아니라는 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는 진리였으니. 


그래서 함부로 친절하지 않겠다는 결심에 하나 더 붙여본다. 후배들에게 함부로 보이는 선배는 되지 말겠다는 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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