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4
최근 67회를 맞은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이 도서전은 1947년 교육박람회로 시작하여 1995년 국제도서전으로 격상되어 이어져왔다고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계속해서 진행되어 온 행사라니, 빠르게 생겼다 사라지는 다른 행사들과는 달리 장기간 유지되고 있어서 항상 궁금했다. 저긴 무엇을 하는 곳일까. 장수할 뿐만 아니라 작년부터는 인기가 심상치 않더니,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탄 이후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올해는 티켓 15만 장이 얼리버드로 다 소진 돼버려 현장구매가 없어 논란이 되며 주최 측에서 사과하는 글을 올리는 해프닝도 있었던 그런 해였다.
국내외 17개국 535개 출판 관련 단체가 참여하는 큰 도서전인 만큼 행사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가장 먼저 독립출판사들이 모여있는 다소 구석진 공간의 '책마을'로 향했다. 대형출판사에 비하면 매우 작은 부스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책마을이라는 이름과 잘 어울렸다. 원래 목적지였던 '터틀넥프레스'에서는 사인회를 진행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몰려있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기다리는 김에 계획에 없던 책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책인 <갑자기 어른>의 김져니 작가로 예상되는(실례가 될까 싶어 작가님이신지 물어보지 못했다) 분이 계신 부스에서 마음에 드는 엽서 몇 장을 골라 담았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며느라기>를 쓰고 그리신 신수지 작가도 나와계셨고(다행히 이름표를 달고 계셔서 작가님인 줄 알아볼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루룩 읽은 책인 <평양냉면>을 펴낸 원재희 작가도 자리해 계셨다.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작가님들을 (혼자) 만나며 그동안 감명깊게 읽었지만 기억속에 파묻혀있던 좋아하는 책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런 책을 쓴 작가님들은 뭔가 특별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하게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게 피부에 와닿았다.
올해 도서전은 유독 큰 출판사들의 개성 넘치는 콘셉트로 화재가 되었다. 예를 들면 창업 80주년을 맞은 '현암사'의 팔순잔치 콘셉트의 잔치상이 포토존으로 맹활약했고, '시공사'는 공사장 콘셉트로 공간을 꾸미고 직원들은 공사장에서 입을 법한 조끼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책마을의 독립출판사들은 대부분 특별한 꾸밈없이 회의실 테이블 1개 정도 되는 크기의 책상 위에 각자 본인이 쓰거나 만든 책들을 내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작은 공간 안에서 그 출판사만의 분위기와 개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가지수가 많지 않더라도 본인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낸 결과물들만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삼시세끼 어촌편5>에서 손호준 배우가 자신의 색깔이 없는 것이 고민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에 유해진 배우는 '네가 색깔이 없진 않다. 분명 너도 네 색깔이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나도 이 얘기에 동감한다. 같이 출연하는 차승원이나 유해진 배우처럼 이른바 개성파 연기자가 아니라고해서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개성'이란 '다른 사람이나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색깔이 없는 것이 개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채색도 색이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독립출판사들의 책 판매 부수가 다른 부스에 비해 많은 편이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 구경하러 왔다가도 독립출판물의 마력에 빠져 어느샌가 한 권씩 손에 들고 결제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지 않았을까. 나만해도 책마을에서 가장 많은 책과 굿즈들을 쓸어담았다. 개성이 자본을 이긴 것이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책마을에 머물면서 '나도 나의 감성이 담긴 좋은 글을 써보겠어'라는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넘치게도 많이 만났다. 역시 취향은 취향을 부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