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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연필 이야기

연필 도구에 관하여

by 독서백일

나는 특히 연필이 많은 편이다. 처음 누드 크로키를 배우러 갔을 때, 연필은 납작한 것을 쓰는 것이라 배운 이후, 연필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게 된 것 같다.누드크로키가 납작 연필을 쓴다고 갑자기 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 한참이 지나서 누드크로키를 다시금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 그 선생님은 연필이 아니라 압축 목탄을 사용하라 하셨는 데, 몽당연필을 볼펜봉에 끼워서 사용하던 나로서는 ‘압축 목탄’이라는 비싼 필기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심히 충격이었다. 스케치북보다도 더 비쌌던 연필이었다.


목탄은 나무를 태우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였는 데도 ‘압축 목탄’이라는 호칭으로 그것도 파버카스텔이라는 브랜드를 가지고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참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크로키 작가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이 것 저 것 연필을 사모으기 시작했고, 이제 나름대로 연필통에 여러 브랜드의 여러 제품이 꽂혀있는 것을 보면 연필에 대해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 에세이를 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납작 연필은 크로키에 꼭 필요한 필기구는 아니고 그냥 선생님 개인 취향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크로키를 제대로 배워보지 못하고 연필 탓만 하고 있었다. 나 같은 초보자는 그때 납작 연필이 아니라 납작 할아버지 연필이 주어졌더라도 그림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리라.


납작 연필로부터 시작한 나의 연필 수집은 통 흑연 연필로 이어졌다. 통 흑연 연필이란 말 그대로 나무로 된 부분이 없는 흑연으로만 이루어진 연필을 말하는 데, 내 연필통에 있는 통 흑연 연필은 크게 세 개의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든 코이노어 Graphite Stick 8971 6B. 그리고 독일에서 만든 파버카스텔 제품으로 PITT GRAPHIT 129909 9B 모델과 129902 2B 모델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스위스 제품으로 까렌디쉬에 GRAFCUBE 9B 제품이 있다. 그냥 연필이 아니라 꼭 이름을 다 외우고 있어야 인터넷에서든 전문 매장에서든 구할 수 있는 제품들이다.


크로키 전문가분들이 가장 많이 추천해주시는 제품들인데 다양한 선을 표현하는 데는 가장 적합한 성질의 연필이 아닌가 싶다. 나도 시도해봤지만, 나는 아직 그 경지에 다다르지는 못해 잠시 연필통에서 쉬고 있다.

통 흑연 연필에서 나의 관심이 옮겨간 곳은 점보 펜슬이라 불리는 뚱뚱한 모양을 한 연필이다. 뚱뚱해서 연필심도 또한 두껍다.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모델은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코이노어 회사의 1820/8B 모델이다. 한 번 사용해보고 품질에 너무 반해서 한 다스를 구매하여 사용하고 있다. 연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연필심만 부러뜨려 통 흑연 연필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손으로 그리기도 하고 손가락의 힘으로만 그리기도 한단 말이다. 손가락으로 부러진 연필심만 가지고 그리는 그림 또한 매력적이다. 아마 통 흑연 연필을 쓰시는 선배님들이 그 매력을 알려주려고 하셨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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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점보 연필로 독일에서 만든 스테들러 사의 Mars Lumograph Jumbo 8B와 독일 파버카스텔 제품을 구매하였지만, 코이노어 제품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결국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연필 모델로 돌아온다. 디즈니 캐릭터 디자이너들이 사용했다고 하는 Palomino제품으로 눈에 띄는 오렌지 색으로 만들어져 있다.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정도는 타 브랜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완성해야 하는 크로키에 보다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일본산인 Tomboy 연필은 대학 시절 데생 작업에 가장 많이 사용했었지만, 지금은 명함도 못 내밀고 있다. 왠지 초보자용으로 생각된다. 아무래도 데생과 크로키는 작업 성격이나 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명암을 보다 더 빠르게 넣기 위하여 파버카스텔의 수채화용 색연필을 사용하고 있다. 색연필은 일반 흑연 연필보다 까칠하고 덜 미끄러져서 크로키 작업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선을 그린 후, 그 위에 붓으로 물을 더하면 어느 정도 멋지게 명함을 표현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금은 그래서 색연필을 주로 사용한다. 지난주에 선배 작가님이 선을 좀 더 빠르게 그려보라고 하셔서, 이제는 반은 색연필을 그리고 반은 흑연 연필을 사용할 예정이다.


이 많은 연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연필심의 차이를 느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 자부심이 자신감으로 종이 위에 그려지기를 기원한다. 이번 주에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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