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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백일 Sep 10. 2021

[에세이] 작은 사치


오늘 아침 책꽂이에 있는 책을 중고서점에 넘기기로 했다. 책은 좋아하지만, 책을 더 쌓아놓을 공간이 없었고, 나에게는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책을 더 쌓아 둘 공간이 부족하다면, 이제 과감히 책을 처분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었다.


책이란 읽고 나면 집착이 된다. 자부심도 자만심도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 모든 자만심과 자부심을 짊어지고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겠다 싶어 비우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책장에 책을 쌓아 놓기만 했지 다시 뒤적거리거나 열어보거나 하는 보살핌은 없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내 삶의 일부를 가득 채운 책장을 비우고, 삶의 여유를 만들고자 하는 '비움'이 이번 주 나에게 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사치다.


이런 결정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 읽은 책을 보살피고 예우도 안 해주면서 책을 많이 읽기만 한다고 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인가? 에 대한 자문을 해보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맞는 것 같지만 이사 철이 되어 내가 책 다발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책에 대한 나의 애정도는 이사 철이 되면 급격히 하락하고, 이삿짐에서 가장 버거운 것도 책 다발이었고, 가장 쉽게 버려지는 것도 책 다발이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책 소유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가진 의류에 관한 생각은 훨씬 전에 바뀌어 있었다. '2년간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무조건 의류 폐기함으로 보낸다'라는 원칙은 지난 5~6년간 지킨 원칙이다. 공간에 여유를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이번에는 의류가 아닌 책이다.


이사할 때가 되면 찬찬히 책을 훑어보면서 고르는 여유를 부릴 수 없어, 폐지함으로 직행하는 책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다르게 하고 싶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책 장의 한 칸을 비워보고 이사 철의 처참한 폐기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책장에서 한 권 두 권 책을 꺼내다 보면, 갑작스레 뜬금없는 추억도 함께 묻어난다.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책 읽을 당시의 사건 사고가 연상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수업 준비할 때였구나. 이 책은 독서토론회 처음 참여할 때, 이 책은 독서 100일 루틴을 시작할 때 자청님의 유튜브를 참고하고 읽은 책이었지...



책이 기억앨범이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책마다 사연이 있구나. 그 당시로 빠르게 시간 여행을 다녀온다. 추억 감성에 젖어보기도 하지만, 이왕 부린 사치, 끝까지 부려보려 한다. 오늘 책 장 한쪽은 꼭 비우리라.


책 비우기 첫 단계는 내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밑줄이 그어져 있으면 안 된다.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YES24, 혹은 알라딘에서는 밑줄이 그어진 책 구매를 꺼린다. 밑줄이 그어진 책은 자칫 잘못하면, 중고 책값도 제대로 쳐서 받지 못하고 폐지 취급을 당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흠결같은 밑줄이 나에게는 오히려 반갑다. 책을 떠나보내지 않아도 될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어~ 여기 밑줄이 그어져 있구나. 이 책은 역시 안 되겠어.


이런 식으로 살생부를 건너뛴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이 책은 전공 서적이라서 팔면 안 되고 저 책은 중요한 내용 때문에 안 된다. 책장 비우기의 두 번째 단계는 바로 감정정리다. 나와 책 간에 쌓였던 감정의 크기를 가늠하며, 건질 책은 건지고 보낼 책은 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감정을 추스르며 고른 보낼 책이 얼추 사과 상자 한 상자 분량이다. 이 책들은 모두 중고책방으로 갈 처지다. 막상 이렇게 많은 책을 정리했는데도 책장 한 쪽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책을 앞뒤로 위아래로 이중으로 꽂아놓은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책장에 숨 쉴 여유가 정말로 없었다고 느끼며 미안해한다.


이 책들을 보내고 나면 생기는 공간에 나는 또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울 것이다. 그리고 또 가득 차면 미련 없이 책 비우기 원칙을 실행하겠지. 이 과정을 반복하면 진정으로 나에게 의미 있는 책들만 책장에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확실히 여유 있는 삶을 산다. 사고 싶은 책을 사고, 유행에 맞는 옷과 가구, 핫한 음식점의 요리, 이 모든 것들을 인터넷 몇 번의 클릭으로 집 앞에서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공간을 살 수는 없다. 물건으로 공간을 채울수록 공간에 대한 절대적 결핍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물건에 대해서는 여유 있는 삶이지만, 내가 비워내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음도 함께 알아챈다


이 시대에는 내 것이 아닌 것을 떠나보내고, 여유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진정한 사치가 아닐까? 내 것이 아닌 것을 떠나보내면 공간에 진짜 내 것으로만 채울 수 있겠지. 그리고 10년쯤 지나 내 책꽂이를 보면서 나는 생각겠지.


이 책장에 꽂혀진 책이 진정한 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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