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Mess with Texas
한국에선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심지어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흥행에 성공한 전쟁 영화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6개 부문 후보로 올랐으며, 음향편집상을 받았죠. 동명의 자전적 회고록의 저자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크리스 카일(Chris Kyle)은 텍사스 출신의 전형적인 텍사스 남자입니다.
Don't Mess with Texas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도입부, 크리스 카일이 부인을 만나기 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 다투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일 몰래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들킨 건데, 난 그들의 말다툼 장면보다 뒷 배경 냉장고에 붙어있던 문구 'Don’t mess with Texas'에 눈길이 더 갔습니다. 이 문구를 번역하자면, '텍사스를 건드리지 말라' 또는 '텍사스에 괜한 시비를 걸지 말라'쯤 됩니다. 우리나라에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표현과 유사합니다. 괜히 텍사스 남자한테 시비 걸었다가 주먹다짐으로 번지게 되더라도 쉽게 물러설 텍사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이 문구는 텍사스 주정부가 고속도로 주변의 쓰레기를 줄이고자 했던 캠페인에서 사용하던 표어라고 합니다. 주정부의 조사 결과, 18~35살의 젊은 남자들이 주로 쓰레기를 버린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들을 겨냥하여 이런 캠페인 표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즉 차 안에 있는 쓰레기를 창밖으로 버리지 말고, 집에 가져가서 버리라는 이야기인데, 이 말 안 듣고 '텍사스(정부)한테 까불면 재미없다'라고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았던 셈입니다. 이 표어 덕분인지 몰라도 1986~90년 사이 도로 주변 쓰레기양이 70%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남성 호르몬 넘치는 젊은 텍사스 남자들의 무단 쓰레기 투기를 막으려던 표어가 이제는 텍사스 남자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이 문구는 SSN-744급 핵잠수함 USS Texas의 표어이기도 합니다. '우리랑 싸우면 너희들은 질 거니까, 까불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지는 ‘우리한테 싸움 걸지 않는 게 낫을 거다' 쯤 됩니다. 텍사스 이미지가 좀 거칠긴 거친 모양입니다.
텍사스 남자에 대한 고정관념
우선 텍사스 하면 떠오르는 게 로데오·풋볼·총인데, 모두 강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를 갖습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주인공 크리스 카일 역시 로데오 카우보이였지만, 경기 중 심각한 부상을 당한 이후 로데오 커리어를 접고 해군에 입대하게 되죠. 이처럼 텍사스에서 로데오는 과거형이 아니라, 아직도 건재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현재도 텍사스 관광 상품에 로데오는 빠지지 않으니까요. 제가 아는 지인이 현지인을 통해 텍사스 관광을 했을 때도 로데오를 관람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음은 풋볼인데, 미국 남부에 위치한 주들이 대부분 그렇듯 텍사스에서도 풋볼은 종교에 가깝습니다. 텍사스인들이 열광하는 이 격렬한 스포츠는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나, 구경하는 관람객들에게서나 호전적인 남성 호르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경기 도중 필드에서는 신사도라는 게 없죠. 강하고, 빠른 자만이 살아남는 생존의 법칙을 필드에서 그대로 보여줍니다. 텍사스 남자들은 어려서 풋볼을 직접 하며, 어른이 된 이후엔 경기 보는 걸 즐기죠. 경기 관람할 때도 그냥 얌전히 보는 게 아니라, 맘에 안 드는 판정 나오면 심판한테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납니다.
총도 빠질 수 없는 텍사스의 상징입니다. 텍산(Texan, 텍사스인) 남자들끼리 같이 사격장에 가든지, 아니면 사냥을 같이 가서 유대감을 키웁니다. 이들에게 사냥은 레저이며,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함께 하는 야외활동이기도 합니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크리스 카일도 자신과 같은 참전용사였던 에디 레이 라우스(Eddie Ray Routh)와 함께 사격장에 갔다가 살해를 당합니다. 또한 다음 글에서 언급하게 될 시트콤 <빅뱅 이론>에서 텍사스 출신인 쉘든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자주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총입니다. 또한 텍사스 출신인 제 지인의 남편도 장성한 두 아들 데리고 사냥 여행 가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또한 텍사스 남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텍사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삶의 지표로 삼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경향이 있으며, 도덕,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를 표방합니다. 최근 태아의 심장 박동이 들리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텍사스 주의회를 통과했습니다. 이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엄격한 낙태법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