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Shinique Smith <Bright Matter>
2014년 8월 말 보스톤 방문은 관광목적은 아니었지만, Museum of Fine Arts를 가보지 않을 순 없었다. 당시 보스톤 날씨는 남캘리포니아의 여름 더위를 뛰어넘는 열기와 습기 덕분에 오히려 한여름 서울 날씨와 흡사했다. 낯선 도시의 서브웨이를 타고 찾아간 미술관에 걸어 들어가는 순간, 느껴졌던 서늘한 공기와 도심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고요함으로 인해 평화와 환각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했다. 미술관의 크기와 나에게 허락된 한정된 시간 (그날 저녁 비행기로 엘에이로 돌아와야 했다)을 고려했을 시, 미술관 전체를 다 둘러보는 건 비현실적인 계획이었기에 미술관 직원의 조언을 받아 전시관 몇 개를 선정하여 관람키로 하였다.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다는 나의 말을 듣고 그녀는 쉬니크 스미스 (Shinique Smith) 전시를 꼭 보라고 당부했다.
쉬니크 스미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름만 듣고도 흑인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흑인은 자신들의 주체성을 차별화된 이름을 통해 찾기 시작하면서 자녀에게 백인에겐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조던은 유명한 흑인 농구 선수이지만, 마이클이라는 이름만 놓고 보면 사실 흑인인지, 백인인지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쉬니크라는 이름은 백인 여자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흑인스러운 이름이다. 이외에도 Keisha, DeJuan, Jameer 등등, 이름만 보고도 인종(흑인)을 알 수 있다.
사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중 순수미술에 종사하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쟝르가 다르긴 하지만, 현대 미국 사회에서 음악분야에 미치는 흑인의 영향이 지대함을 놓고 볼 때, 왜 그럴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랩이나 레게 같은 분야). 아마도 대중음악은 예술가의 교육 정도가 그 분야의 커리어와 성공의 함수관계에서 미비한 영향을 미치는 반면, 순수미술로 성공한 예술가 대부분은 명문 미술 사립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밟고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인 듯하다. 미국의 사립대학은 그 학비가 만만치 않음을 감안할 때, 다수가 사회의 저소득층을 형성하고 있는 흑인 가정의 자녀들이 쉽사리 넘볼 수 있는 교육환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니크 스미스는 보스톤 명문 사립대인 Tufts University와 순수미술로 유명한 사립학교 The School of 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에서 MFA (Master of Fine Arts)를 취득하였다.
그녀의 전시 타이틀인 <Bright Matter> 답게 대체적으로 밝은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그녀의 색채 감각은 1940-50년대에 시작된 American Abstract Expressionism의 작가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회화사에서 색채는 형태를 채우는 부수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면, 2차 대전 전후 시각 예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전환되면서 시작된 회화의 새로운 물결은 그 관심을 색채로 돌리는 것이었다.
1940년대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아쉴 고르키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미국 현대 회화사의 움직임은 잭슨 폴락, 리 크라즈너(폴락의 부인), 마크 로스코 등에 의해 색채로 말하는 비구상 계열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후 헬렌 프랑켄탈러나 조운 미첼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 색채가 그림의 중심이 되는 비구상 계열의 작품 명맥이 계승되고, 현대 미국 회화는 비구상(추상) 계열의 작가들이 주류를 이룬다.
스미스의 작품 또한 고르키나 폴락의 작품에서 보이는 동양의 서예(calligraphy)와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위 작품을 보자마자 느낀 점은 잭슨 폴락의 기법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붓을 이용하여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묽은 물감을 캔버스 위 여기저기에 흘림으로써 역동적 움직임이 느껴졌다. 다만, 폴락보다는 색채 팔레트가 밝은 편이고, 페인트 외 패브릭같은 미디엄 또한 사용했으며, 빈 공간을 많이 남겨두었다는 점이 폴락과는 다른 점이었다.
또한 스미스는 옷가지와 천 조각 등을 자신의 그림과 조형물에 사용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녀의 회화를 콜라쥬나 반(半)조형물로 구별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긴, 현대 미술의 특징은 재료의 다양화와 예술 장르의 경계의 모호화에 있으니 그림이건, 반(半)조형물이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본다.
재료의 다양화와 쟝르의 모호화가 현대미술의 특징이라면, 설치미술(Installation) 역시 근대미술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현대미술의 새로운 예술 양식이다. <Breath and Line>이라고 명명된 이 작품은 미술관의 작은 공간 안에 거울, 아크릭 페인트, 조명, 음향, 향기 등을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공간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여느 그림처럼 벽에 걸려있는 작품을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은 이 공간 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오감을 통해 작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는 향기를 맡고, 빛과 어두움을 피부를 통해 느끼면서 내 의식의 영역 안으로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 느낌 자체가 예술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미술관 입장료로 지불한 25달러, 이제까지 가본 미술관 중에 최고로 비싼 금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