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Yourself
<Keeping up with the Kardashians>
미국 리얼리티 쇼의 대명사인 <Keeping up with the Kardashians>는 2006년 케이블 텔레비젼 방송사인 E!를 통해 방송되기 시작해 장장 스무 번째 시즌을 마지막으로 올해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힐튼 호텔의 상속녀인 패리스 힐튼의 친구로서 그녀의 옷장을 정리해주던 킴 카다쉬안을, 오늘의 킴 카다쉬안으로 만들어준 것은 전 남자 친구와 찍은 섹스 비디오의 불법 배포 덕분입니다. 그저 그런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던 킴은 이 섹스 비디오 덕분에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카다쉬안 가족이 이 리얼리티 쇼를 통해 축적한 부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쇼에 출연했던 다섯 명의 딸 모두 백만장자 아니면 억만장자가 됐으니 말입니다. 가장 유명한 카다시안인 킴은 자산 규모가 1조 원 이상이라고 합니다. 큰딸인 코트니는 지난달 어떤 뮤지션과 약혼 발표를 하면서 커다랗다 못해 돌멩이 크기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자랑했습니다. 가장 미모가 딸리는 미운 오리 새끼였던 셋째 딸 클로이는 메이크오버를 통해 심신이 거듭났다고 합니다. 가장 미모가 뛰어난 넷째인 켄달 제너는 이미 십 대에 모델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캘빈 클라인 모델을 엮임 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쇼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던 막내딸 카일리 제너가 성형 수술을 통해 인물만 나아졌을 뿐만 아니라, 사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2014년에 설립된 카일리 코스메틱은 5년이 지난 2019년, 회사 지분의 51%를 7천억 원을 받고 화장품 거대 기업인 코티에 매각했답니다.
영화나 텔레비젼 드라마가 허구의 인물을 가공해 시놉시스에 따라 스토리 전개를 하는 반면, 리얼리티 쇼는 실제 인물의 (가공된) 실제 삶을 다루는데요. 미국에서 이런 리얼리티 쇼가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헐리우드의 경제적, 문화적 위상
1970년대까지만 해도 디트로이트 지역은 미국 자동차 회사 빅 3(포드, GM, 크라이슬러)의 본거지로 많은 월급을 주는 좋은 제조업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핏츠버그와 같은 동부의 도시는 철강업이 발달했고요. 하지만 그건 이제 모두 옛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재 미국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퍼센트가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2015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트럼프가 내걸었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는 자동차 산업이 전성기였던 시절의 미 중서부 지역과 철강 산업을 아시아의 국가들에게 자리를 내준 핏츠버그 도시 인근 백인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표어입니다. 그들은 블루칼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집과 주말 별장 그리고 자동차 두 대를 굴릴 정도로 풍요롭게 살았거든요.
하지만 이제 미국 경제의 핵심은 금융과 서비스업입니다. 특히 헐리우드의 영화 산업은 국내 수요층만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마케팅을 하기 때문에 미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바가 지대합니다. 그 경제적 영향력만큼, 영화 자체가 현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매우 큰데요. 우리는 영화를 통해 다른 인생을 경험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현재 영화가 담당하는 역할을 책이 했었죠. 책을 읽으면서 시공을 초월한 경험을 하였고, 이야기 속 주인공이 돼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상의 보급력이 활자의 그것을 넘어선 지금 문화적 경험의 상당 부분이 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헐리우드는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문자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 특정한 가치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가 문화 전도사의 역할을 담당하는 셈이죠.
헐리우드 영화는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중 가장 선호도가 높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Dream comes true’입니다. 1990년대 초에 개봉되었던 영화 <귀여운 여인>에 나오는 "여기는 꿈이 이루어지는 헐리우드"라는 유명한 대사처럼 ‘꿈은 이루어진다’는 캐치 프레이즈는 헐리우드 영화가 전하는 단골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막상, 헐리우드 제작자 대부분은 중년을 넘긴 머리 희끗희끗한 백인 남자들로 이룰 꿈이라고는 자본의 확장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입니다. 희망을 파는 장사가 가장 잘되는 장사인 건 맞는 거 같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너 자신에 대해 신뢰를 가져라'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너는 너일 뿐이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라’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다' 등과 같은 메시지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는 ’Be yourself’입니다. 이는 타자의 시각이 아닌 주체적 시각에서, 부정적 시각보다는 긍정적 시각에서 자아를 인식할 것을 부추깁니다. 그만큼 이 세상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듯합니다.
Be Yourself
2013년 말에 개봉하여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은 한국에서도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죠. 이 영화는 디즈니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합니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기도 했지만, <겨울왕국>이 여타 디즈니 만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기존의 공주들이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의타적인 캐릭터였다면, 엘사와 아나는 자매애를 통해 서로를 구하는 자발적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쁘고, 항상 얌전하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캐릭터들이 겨울왕국에 와서는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보이게 됩니다. 착하디 착하기만 하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고, 내 생긴 대로 살겠다는 이야기죠. (엘사가 부르는 <Let It Go>가 사실은 그런 반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이 전통은 2021년 개봉된 영화 <크루엘라>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까만 머리와 흰 머리카락이 완벽하게 이분화된 모습으로 태어난 에스텔라는 어떻게든 자신의 머리카락을 숨겨야 했습니다. 양모의 손에 이끌려 머리를 염색하고 보통 아이처럼 학교에 입학하게 되죠. 하지만 또 다른 자아인 크루엘라는 여린 순정만화 여자 주인공과 달리, 못된 남학생을 골탕 먹이고 그들과 주먹다짐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한편, 드림웍스가 만든 애니메이션 시리즈 <슈렉>에 나오는 피오나는 푸짐한 몸매의 초록빛 공주입니다. 원래는 아름다운 공주였는데, 마법에 걸려 밤마다 초록 괴물로 바뀌는 줄 알았죠. 그래서 마법이 풀리면 밤이나 낮이나 아름답고 우아한 공주로만 살아갈 거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공주다운 모습이 마법에 걸린 결과였고, 진짜 본모습은 초록빛 괴물이었던 겁니다. 마법이 풀린 못 생기고 몸매도 안 되는 공주가 자기 본모습을 투정 없이 받아들이고, 자기랑 비슷한 초록색 괴물 남편인 슈렉과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Be Yourself'는 바로 이런 겁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건 말건 상관없이, 나는 그냥 나로 사는 것. 남과 다르게 태어난 엘사의 손에 그녀의 부모는 장갑을 끼워줬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저주받은 능력이 드러나게 되자 그때부터는 그걸 감추려고 하기보다 드러내 놓고 살겠다는 것이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법이었다. 영화 내내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는 에스텔라와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 크루엘라를 오가며 살던 주인공은 에스텔라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결국 크루엘라로만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슈렉> 첫 번째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피오나는 해가 지고 나면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파퀴어드 영주와 슈렉,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한 관람객에게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초록색 괴물로 변한 피오나를 본 파퀴어드는 구역질 난다 (disgusting)고 서슴없이 말하죠. 한편, 마법이 풀렸으면 아름다워져야 하는데 이런 모습인 게 이해가 안 된다는 피오나 공주를 향해 슈렉은 당신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뭐, 슈렉이 초록색 괴물이라 초록색 공주가 이쁘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반론하면 할 말 없지만,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Be Yourself' 메시지를 전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