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사와 관촉사 설화
부여군 임천면의 대조사는 527년 담혜에 의해 창건되었다 전해진다. 하지만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다. 백제시대에서 통일신라까지 수백 년간 작은 암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고려에 이르러 미륵신앙을 통해 크게 중흥했음을 알 수 있다. 논산시 은진면의 관촉사 또한 그렇다. 관촉사는 고려 광종 19년(968년) 혜명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과 동시에 석조 미륵보살상도 완성되었다. 은진면에 있다 해서 흔히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한국에서 가장 큰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대조사의 미륵보살입상은 조성시기와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조성한 방법은 다르다. 두 불상의 차이점을 설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보물 217호인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대략 10미터의 크기의 대형 석조불이다. 옆의 소나무는 수령 300여 년 된 소나무이니 석조보살입상이 조성될 시기에는 없었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대조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단 하나의 암석을 조각해 만들었다.
발은 없는데, 밑 부분은 옆 큰 바위와 연결되어있다. 석조보살입상과 옆 바위는 처음에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부터 약간 붉은색을 띠어 몸통 부분과 차이가 보여 머리와 몸통이 다르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의 바위로 완성되었다.
백제 성왕(재위, 523 ~554년)이 재위 당시 한 노승이 성황산 커다란 바위 아래 암자를 짓고 참선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한 마리의 황금빛 새 한 마리가 서쪽에서 날아와 지금의 대조사가 있는 곳에 날아와 노승이 암자를 지은 곳의 큰 바위를 향해 날갯짓을 하는 것이었다. 새의 날개에 반사된 황금빛이 바위에 닿자 바위 안에서 관세음보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몇 날 며칠 같은 꿈을 꾸자 노승은 이를 가림성주에게 알렸고, 가림성주는 성왕에게 기이한 일을 전했다.
마침 성왕은 공주에서 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려 했는데, 그 일이 길조라 생각하며 지금의 대조사에 사찰을 짓게 했다. 천도를 위해 공사를 앞당기려 많은 사람을 투입했으나 일은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 한 마리 황금빛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니 사람들은 피곤을 잊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초 10년의 공사기간을 5년으로 줄이게 되어 지금의 대조사가 완공되었다. 그래서 사찰 이름을 큰 새가 찾아왔다 해서 대조사大鳥寺라 했다 전해진다.
해설
대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 그런데 석조 미륵보살입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초다. 창건 시기의 백제 성왕의 권위를 가져와 석조 미륵보살입상의 권위를 높이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설화에서 백제 성왕의 권위를 가져와야 했던 시대적 요구인데 패망한 백제 유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고려 왕조와 불가의 계획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지금의 대조사 원통보전 앞의 3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 석조 미륵보살입상이 세워진 고려시대 이전에도 중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의문점은 석조 미륵 입상을 만든 바위를 전에도 탑을 세우거나 건축물에 이용할 수 있었음에도 고려시대에서야 석조 미륵 입상이 세워진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시대적 정황은 분명 백제유민들을 달래기 위했던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유에 관한 것이 설화에 담긴 것은 아닐까. 다시 설화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황금빛 새는 불교와 고대 신앙을 통해서 해석해 보자면, 불교에서는 부처의 몸을 상징하는 장육금신을 상징하고 고대신앙에서 새는 천신과 연결된 존재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치술령설화에서 박제상의 아내는 남편을 그리워하다 은을암이 되고 딸 셋은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바위가 된 박제상의 아내와 새가 된 딸들을 통해서 신모神母가 될 수 있었다. 황금빛 새가 날아왔다는 것은 장육금신인 부처가 왔다는 것과 천신이 내려왔다는 의미가 결합된 것이다. 황금빛 새를 등장시킨 것은 불교신자이거나 불교신자가 아닌 고대신앙 신자라 하더라도, 석조 미륵 입상에 신성함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불교적인 장육금신이야기를 고대 신앙의 의미와 결합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설화가 논산시 은진면의 관촉사 설화다.
관촉사는 고려 광종 19년(968년) 혜명 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관촉사의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창건과 함께 조성되었으며 규모면에서 대조사의 석조 미륵보살입상보다 8미터 정도 큰 18미터의 웅장함을 자랑한다. 크기뿐만 아니라 매끄러운 곡선과 잘 다듬어진 직선을 통해서 대조사의 석조 미륵 입상보다 완성된 느낌을 준다. 불교적인 상징성을 과감히 보여주고 있다. 염화미소를 보여주는 얼굴, 불상의 수인을 보여주는 손, 부처 사후에 관 밖으로 내밀었다는 발은 매우 크게 만들어졌다. 관촉사가 다른 사찰과 다른 점은 석탑과 석등이 대웅전 앞에 있지 않고 석조 미륵 입상 앞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사찰들이 1 탑 1 금당이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석조 미륵 입상이 대웅전의 주불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광종 19년(968년) 두 여인이 반야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두 여인이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 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땅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니 멀리 개경의 왕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왕은 괴이한 일이라 생각하고 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하였다. 신하들은 한결같이 하늘이 내린 계시라 생각하고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간언 하였다. 왕은 금강산 혜명 대사에게 불사를 조성할 것을 명한다.
석공 백여 명과 함께 반야산에 도착한 혜명은 바위를 보고 예삿바위가 아님을 알았다. 석공들에게 그 바위로 미륵불의 하반신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인근 우두산에서 바위를 가져와 미륵의 몸과 머리를 만들게 했다. 모두 세 부분으로 완성되어 맞추기만 하면 됐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 올릴 수 없었다. 혜명이 그 답을 얻고자 궁리하며 근처 냇가를 찾았는데, 아이들이 세 등분된 석불을 모래로 올리는 놀이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혜명은 아이들에게서 답을 찾고 바로 석공들을 불러 모래를 쌓아 석불을 완성하게 되었다. 석불의 미간에 있는 백호수정에서 빛을 발하자 멀리 중국까지 도달하였다. 그 빛을 따라 중국의 지안스님이 찾아와 광명이 촛불과 같다 하여 관촉사라 했다 한다.
두 여인이라는 표현이 그저 보통 사람을 뜻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여인들이 찾았다는 점에서 아이를 낳게 해 달라 치성을 올린 기자치성바위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대조사의 바위와 마찬가지로 조각되기 이전에는 고대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설화에서 모래로 석불을 올린 아이들은 지혜와 수행을 상징하는 문수와 보현보살을 의미한다. 우두산에서 가져왔다는 말에는 심우도의 내용을 포함했다 것을 말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경전의 내용을 조각했다는 것이다.
불가의 뜻을 담아 세 부분으로 나뉘어 조각한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인체 비율과 다른 커다란 발, 손, 머리는 불가의 가르침을 석불이 말없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촉사 석조 미륵 입상의 세 부분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다시 21일간 고민하여 해탈하고자 했으나 제자들이 말리자 그 뒤 어떤 질문에도 꽃을 들어 보이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이며,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 하늘과 땅을 손으로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을 의미하며, 부처가 죽어 관에 들어가 가섭에게 발을 보여주며 진리의 족적은 세상에 이미 다 드러냈다는 의미다.
장자 소요유逍遙遊편을 보면 혜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쓸모없는 두 가지를 장자에게 말한다. 위왕에게 받은 박씨를 심었더니 너무 큰 박이 열려 그 안에 물이나 장을 담으면 무거워지고 박을 쪼개 표주박을 만들면 너무 평평해 쓸모가 없어 박을 쪼개버렸다는 것이다. 또 자기 집에 큰 나무 하나가 있는데 혹 투성이어서 먹줄을 칠 수 없고 가지는 뒤틀려 있어 자를 댈 수 없어 어떤 목수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장자는 혜자에게 답하기를 큰 박은 배를 만들어 양자강이나 동정호에 띄워 물놀이를 하면 되고, 큰 나무는 광막한 들에 심어 아무 하는 일 없이 왔다 갔다 하거나 유유히 노닐다 잠들지 못하는 것이냐며 나무란다. 장자에게 있어 쓸모없음을 정하는 것은 일시적인 고정관념이다. 용도라는 것은 시절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든 예를 보면 손 안트는 약을 사용해 빨래를 하던 사람과 약의 제조방법을 백금에 사서는 겨울에 군사들의 손에 발라 전쟁에 이겨 큰 명예와 천금의 재물을 얻은 사람의 예를 든다. 또 태우라는 큰 소를 예를 들며 아무리 몸집이 태산을 뒤덮을 수 있다 하더라도 작은 쥐는 잡지 못한다 말한다.
고대신앙에서 바위는 신성한 존재였다. 불교가 들어와 바위로 탑이나 석불을 만든다는 것은 반발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런데 점차 신앙이 불교로 대체되면서 고대신앙에서의 숭배 대상이었던 커다란 바위는 찾는 사람이 뜸해졌을 것이다. 신성시되던 바위가 쓸모없는 바위가 되었고 그 바위로 석불을 조성한 것은 시절에 따라 쓰임을 알맞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대조사와 관촉사 설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쓸모없는 바위라 할지라도 쓸모 있게 하고, 석불이나 건축물에 사용할 수 없는 쓸모없는 바위라 할 지라도 이름은 붙여 주었던 지혜가 아니었을까 한다.
관촉사로 향하기 전, 은진면 주차장 근처의 대바우다. 대바우에 배를 묶어 대었다 해서 대바우라 하며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 해서 거북바위라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바위에 승려 혜명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바위에 생각이 매여있느냐 아니면 거북이 대해大海를 자유롭게 헤엄치 듯 생각이 자유로운지 지금의 우리들에게 묻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