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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설화

선운사 설화

by 꼭그래

선운사 창건

_DSC1522.JPG 선운사 대웅전 비로자나불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526 ~ 576년)의 창건설화, 검단선사의 중건설화 그리고 검단선사가 마애불에 넣었다는 비결秘訣에 관한 세 개의 설화가 전해진다. 선운사 창건설화는 1707년 조선 숙종 33년에 쓰인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로 전해진다. 진흥왕 당시에 고창이 백제의 영토였기에 검단선사의 중건설화가 창건설화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진흥왕의 이야기를 무시한다면 도솔산(지금의 선운산)과 선운사, 도솔암, 도솔암 동부암지 마애불이 선운산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어느 한 이야기를 배제할 수 없다. 도솔천兜率川부터 선운산 정상을 지나 배맨바위까지의 일대를 눈과 귀와 마음에 담아야만 선운사 설화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진흥왕 창건설화

_DSC1664.JPG 선운산 진흥굴

진흥왕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재위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법운法雲이라 칭했으며 왕비 역시 여승이 되어 영흥사永興寺에서 생을 마쳤다 전해진다. 선운사에 전해지는 진흥왕에 관한 설화를 보면,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 중애 공주와 더불어 선운사 굴(지금의 진흥굴)에서 기도를 했다. 어느 날 꿈에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감응해 자기 딸의 이름으로 중애사를 창건하고 부인의 이름을 따 산의 이름을 도솔산이라 하였다.


해설


도솔천兜率川

_DSC1666.JPG 선운산 도솔천

선운산으로 접어들면 도솔암에서 시작되는 도솔천이 흐르고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 석가모니가 아직 보살일 때 머물던 곳이며 미래불인 미륵불이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리며 설법을 한다는 도솔천兜率天의 이름에서 내 천川자가 결합한 도솔천兜率川이 검게 흘러 내려온다. 이 검은색에 관해 참나뭇과 나무의 타닌이 침전하여 검게 보인다는 안내문구가 있지만 옛 선사들의 눈에는 미륵불의 하생과 관련지어 생각했을 것이다. 검은색은 도솔천에서 미륵불의 법이 문자로 이 땅에 내려왔다는 의미를 담으려 도솔천兜率川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기에 선운사의 대웅전에는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종파에 속하는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이유다.


이차돈의 순교


설화에 진흥왕이 등장하게 된 이유도 이 도솔천의 빛깔 때문이다. 진흥왕의 숙부인 법흥왕대에 불교를 공인하게 되는데, 이차돈의 순교 때문이다. 이차돈의 순교에 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에 아도화상과 묵호자가 찾아와 불법을 전하려 했지만 신라의 대신들과 백성들은 반대한다. 불교를 신라에 흥기 시키려던 법흥왕은 반대에 부딪쳐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때에 법흥왕 곁에서 모시던 근신近臣 이차돈이 말하기를,

"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중의衆議를 정하십시오"

하지만 왕과 신하들이 반대하자 이차돈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연후에 비상한 일도 있는 것이거늘, 듣건대 불교는 이치가 깊다고 하니 불가를 믿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자 법흥왕이 이차돈을 비롯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을 깨뜨릴 수 없는데 그대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편을 따를 수는 없다."

그리고 형리에게 일러 죽이게 했다. 그러자 이차돈은 죽음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법을 위해 형을 받으니 불佛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

급기야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는데 빛이 희어 젖과 같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괴이히 여겨 다시는 불사를 비방하지 않았다.


_DSC1648.JPG 도솔암 극락보전과 극랑왕생기원 등

선운사나 도솔암에 남은 문화재 연대를 보자면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고려 말이다. 진흥왕이 창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화에 진흥왕을 등장시켜야 하는 이유는 도솔암이라는 윗 일과 선운사라는 아랫 일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도솔천兜率川이 시작되는 도솔암에는 검은 빛깔이 없다. 이차돈의 몸에서 하얀 피가 솟구치던 것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의 몸에는 문자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는 의미다. 법을 전하기 위한 한 방편이 문자일 뿐이지 그 문자 자체가 만고불변의 법일 수 없다는 것을 설화로서 전하려 했던 선사들의 생각일 것이다.

_DSC1659.JPG 도솔암 아래의 도솔천 모습

진흥왕의 비는 이름이 도솔부인이 아니라 박씨 사도思道부인이다. 진흥왕에게는 중애라는 딸이 없다. 사도부인에게서 얻은 태양, 아양, 은륜, 월륜이 있고, 후궁에게서 얻은 반야, 난야, 덕명, 난성이 전부다. 그렇기에 중애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서 이차돈이 중의衆議를 따라 순교했듯 선운사와 도솔암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희생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검단선사 창건설화

_DSC1532.JPG 선순사 조사전 검단선사 진영

옛날 선운리라는 마을에 산적과 해적들이 나타나 주민들을 괴롭혔다. 그들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어 그렇게 빼앗기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한 노인이 찾아온다. 소금과 종이를 만들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되어 찾아왔으니 마을에 작은 움막을 짓고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촌장은 비록 차림새는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인자한 모습이라 허락하였다. 살아갈 움막이 완성되자 노인은 그날부터 해변에 나가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내보니 노인이 지혜롭다는 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따라 소금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하며 그를 따르게 됐다. 마을에 산적들이 나타나 노인의 소금을 모두 가져갔다.

_DSC1618.JPG 선운산 배맨바위

그러던 어느 날, 바다 한가운데 이상한 배가 나타났다. 배는 인기척이 없으면 떠올랐다가 인기척이 있으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노인에게 전하자 노인은 바닷가로 향한다. 노인이 해안가에 다다르자 물속에 있던 배가 떠올라 노인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었다. 노인이 배에 오르자 백의 동자가 나타나 노인에게 하는 말이, 인도의 공주의 심부름으로 금불상을 동쪽 바다의 소금 만드는 노인에게 전해 주려 왔다는 것이다.


마을에 큰 못이 있는데 악룡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용을 물리치고 돌을 던져 못을 메우던 중 마을에 심한 눈병이 돌았다. 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숯을 가져와 못에 던지고 눈을 씻게 했다. 그러자 눈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못에 찾아와 눈병을 치료하고 돌아갔다. 못은 그렇게 메워지게 되고 그 위에 절을 지어 관세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을 모시고 염불에 열중하게 됐다.

선운사.jpg 선운사 산신각 산신탱, 좌측의 검단선사와 우측의 신라 의운화상

이번에는 해적들이 마을에 나타나 노인에게 소금을 내놓으라 했다. 염불 하느라 소금을 만들지 못했다고 하자 해적들은 불상과 노인을 해하려 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나 해적들을 위협했다. 겁에 질려있던 해적들이 창과 칼로 호랑이에 맞서려 하자 노인이 호랑이를 쓰다듬으며 돌아가라는 말을 하자 호랑이는 공손히 절을 하며 산으로 되돌아 갔다. 해적들도 예사 노인이 아니라며 그대로 달아났다. 훗날 해적과 산적들이 노인에게 찾아와 절을 하며 새 사람이 될 것을 맹세했다. 노인은 해적들에게 소금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고 산적들에게 종이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생계의 수단으로 살게 했다. 자신의 일을 마쳤다며 떠나는 노인에게 마을 사람들이 이름을 묻자 검고 붉다는 검단黔丹이라 말하며 떠났다 전해진다. 훗날 사람들은 선운사에 많은 소금을 공양했다 전해진다.


해설

_DSC1604.JPG 선운산 용문굴, 달아나던 용이 이곳을 지났다해서 용문굴이라 한다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지금의 방식은 일제시대 일본에 의해 전해졌다. 소금 만드는 옛 방법은 바닷물을 끓였다. 물에서 소금이라는 형체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불을 지펴야 한다. 그 불로 오랜 시간 끓여야 비로소 소금이 만들어진다. 불심佛心또한 그러하다. 마음에 심인과 교인을 담아 열을 다하여 갈고닦아야 드러나게 된다. 드러난 불성은 소금이 물에 녹아 사라지듯이 처음부터 텅 빈 것이다. 이것이 도둑과 소금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유다.

_DSC1528.JPG 선운사 조서전 벽화, 의운화상의 참당암(대참사) 창건

진흥왕 창건설화와 비슷한 의원화상의 참당암 설화가 전해지는데, 돌배에 불상과 경전을 가져와 지금의 참당암을 짓게 되었다 한다. 검단선사의 선운사 창건설화에 더해지기도 빠지기도 한다. 의운화상에 관해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진흥왕 시대의 승려라는 설과 백제 승려라는 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돌로 만든 배가 물 위에 뜰까? 쇠로 만든 배도 뜨기는 한다. 단 현재의 기술로 가능하다. 돌배가 바닷물에 뜬다는 것은 장자 소요유편을 보면,


"물의 깊이가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만한 힘을 지니지 못한다. 한 잔의 물을 뜰의 패인 곳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뜨겠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땅에 닿는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상과 불경을 서역이나 중국에서 가져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단순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돌로 만든 배에 실려 왔다는 것은 장자의 물과 배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불상과 불경을 싣고 돌로 만든 배를 띄우기 위한 물의 힘은 바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대해大海와 같이 넓고 깊은 진리의 세계가 부처의 가르침의 세계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용을 물리친다는 것은 앞서 만어사를 통해서 설명한 부분이며 숯으로 못을 메워 어머니의 병환을 치유해 생명을 연장하게 했다는 금산사설화와 달리 선운사 설화에서는 눈병을 치료한다. 그렇기에 숯은 금산사와 달리 해석된다. 경전에만 눈이 멀어 마음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_DSC1623.JPG 선운산 정상에서 바라 본 서해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검단선사가 선운사라 했던 이유다.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고 달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보이지 않지만 있다는 것을 아는 것. 태양이 밝게 비춰 달이 보이지 않더라도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법法과 도道도 눈과 입과 귀가 아니라 구름을 걷어내고 맑은 달을 마음에 담는 마음처럼 선정의 경지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선운산 정상에 오르면 산 아래의 구름과 같이 보이는 서해가 보인다. 저 구름과 같은 바다가 깊을수록 산은 높아진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선운산의 마음의 높이가 결정되는 것이다.


마애여래불상과 비결

_DSC1634.JPG 선운사 동불암 마애여래불

백제 위덕왕의 부탁으로 검단선사가 암벽에 불상을 조각하고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했다고 한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있고 그 속에 신비한 문서가 들어있는데 유출되면 한양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1820년 전라감사 이서구가 그 문서를 꺼내 보려다 뇌성벽력이 일어나자 다시 봉해두었다 한다. 1892년 동학접주 손화중이 열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한다.


마애여래상 (2).JPG
마애여래상2.JPG

해설


지금까지 검단黔丹중에서 검은 빛깔을 이야기했다면 이제 선운사 설화의 마침이 될 붉은 단丹의 마애불 이야기다. 도솔천兜率川의 검은빛의 끝나고 도솔천兜率天의 밝음이 시작되는 도솔암 부근에서부터는 흙빛도 밝아진다. 마애불이 조각된 암석이기도하며 정상부근에 산재한 유문암 때문이다. 유문암이 침식되어 지층을 형성한 도솔암 부근부터 밝은 빛이다. 마애불이 조각된 암벽이 붉은 이유는 유문암 속의 철 성분이 산화되었기 때문이다.

보은함.JPG 검단선사 진영 속의 보은염함

검단이 마애불에 넣어뒀다는 비결에 무엇이 적혀있는가의 궁금증은 이차돈의 피와 검단선사 진영의 보은염함과 이곳 도솔천의 밝음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흰 백지의 두루마리다. 도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지,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사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비결은 말이 적힌 것이면 안 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세간의 방편으로 문자로 전해지지만 진정한 도는 마음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하려 마애불의 가슴에 비결이 있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진흥왕이나 검단선사가 선운사와 도솔암을 세운것이 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설화를 통해 마음으로 도를 구하라는 가르침을 전하려했던 이야기가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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