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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설화에 관하여

사찰설화를 해석하는 이유

by 꼭그래

제 나라의 제환공이 어느 날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이 계단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아 만들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올라가 제환공에게 물었다.

"한마디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책입니까?"

제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네"

"성인이 지금 살아계십니까?"

제환공이 대답했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제환공이 그 말을 듣고 화가 나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어찌 수레바퀴 만들고 있는 목수 따위가 시비를 건단 말인가?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괜찮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

윤편이 대답했다.

“제 일의 경험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느리게 하면 헐렁해서 구멍에 꼭 끼이지 못합니다. 빨리 깎으면 빡빡해서 돌아가지 않습니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것은 손에 익숙하여 마음에 응하는 것이라서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익숙한 기술이라서 저는 그것을 제 자식에게 가르칠 수 없고, 제 자식도 저에게서 배워 갈 수가 없어서 이와 같이 제 나이 70이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 성인도 마찬가지로 깨달은 바를 남에게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왕께서 읽으시는 것도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동양 고전인 불교 경전, 논어, 중용, 노자, 맹자, 장자의 글들 또한 옛 성인들의 찌꺼기일 뿐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문제에 관한 해답의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전들을 읽는 이유는 인간을 중심으로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찰 설화도 옛 찌꺼기일 뿐이다.


사상들이 인간을 관찰했던 사유의 결과라면 설화는 승려들의 삶의 공간에 사상을 결합한 것이다. 사찰 설화는 승려들과 신도들의 종교 생활공간에 종교의 사상을 이야기 형식으로 결합한 것이다. 설화는 사상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사찰 공간에서 사상을 발견해 내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찰 설화는 사찰의 창건 사실과 역사사료의 사건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이용되고 있다. 그것이 사찰 설화를 재해석하게 한 이유다.


사찰 설화의 해석을 위해서는 당연히 불교사상을 통해서다. 그런데 사상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것은 경전의 내용 그대로 전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선사들의 생각을 통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선사들에게 영향을 끼친 중국 선사들의 어록을 참고하려 했다. 한국 선사들의 사상은 남인도 파사국에서 470년경 중국으로 건너온 보리달마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의 사상은 200여 년 간 장자의 사상을 통해서 중국화 된다. 중국화가 완성되던 당나라(618 ~ 907년) 말엽에 이르러 백장회해에 의해 선사들만의 사찰이 세워지고 대혜보각등의 선사들의 어록을 통해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사상만이 아니라 당시 승려들이 처한 상황도 참고해야 한다. 당나라 말엽부터 송나라(960~1279)가 세워지기 전 오대십국 시대(907~ 960년) 시기에 한반도의 승려들이 중국의 선종 사상을 들여오게 되었다. 이 시기는 다섯 큰 나라인 후당, 후진, 후한, 후주, 후량과 남한, 북한, 전촉, 후촉, 형남, 민, 오월, 오, 남당, 초의 작은 열 개의 나라로 대립한 혼란기였다. 한반도 또한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와 당에 의해 멸망하고 신라의 통일과 당의 세력을 몰아내던 혼란기였다. 이런 정치적 배경에 의해 선종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당말 이전까지 왕조의 지원으로 불교계가 성장했지만 당송 교체기에는 왕조의 지원이 끊기는 불교계 몰락의 혼란기였다. 선사들이 교종 사찰에 의지해 자신들의 사상을 발전시키다 그들만의 사찰이 요구되었다. 당말 엽 최초의 선종사찰인 백장사가 세워진 이후 교종의 사찰을 벗어나 선종 승려들인 선사들은 그들만의 사찰을 세우게 된다. 자치공동체 성격인 선사들은 왕조의 지원 없이 그들의 노동력을 통해서 선사를 운영하게 된다. “일하지 않으면 먹어서도 안 된다”라는 말이 당시 선사의 슬로건이었다.


왕조의 지원이 끊긴 교종 계열의 사찰들은 폐사되거나 이교도들의 은신처로 전락하게 된다. 선사들이 그곳을 찾아 다시 불법을 전하게 되면서 교종의 사찰이 선종의 사찰로 전환하게 된 시기가 당 말엽과 오대십국 시대였다. 한반도의 승려들도 중국 승려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다. 다른 점이라면 두 나라가 신라라는 하나의 국가로의 통합이었다는 점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잔존세력을 진압하고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던 문무왕은 신라에만 있던 승려 관직인 대서성(大書省)을 통해 통일작업을 이루려 했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이었던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삼고 그를 보좌할 대서성으로 의안법사를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승려들에게는 고구려와 백제의 처지를 보며 자신들도 왕조의 지원이 끊기는 상황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곧 닥칠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을 것이다.


왕조의 통일에 협력하면서 신라 말엽에 이르러 선종 구산문이 개산 되었다. 구산문이 개산 되면서 교종과 선종은 종파를 달리해 발전하게 된다. 중국과 일본의 불교계가 서로 갈라져 발전해 왔다면 한국의 교종과 선종은 조선 후대에 이르러 통합한다. 사찰 설화를 통해서 그 흔적들을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글에서는 그 과정과 당위성에 관한 것을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설화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에서 추출해 낸 사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강을 건너는 방식에는 두 방식이 있다. 강을 따라 올라가다 좁아진 곳에서 건너기도 하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다리나 배에 올라타 건너간다. 사찰 설화의 해석은 좁은 견해로 해석하기도 하고 옛 문헌인 선사어록과 장자를 통해서 건너기도 할 것이다.


산을 넘는 데에는 두 방식이 있다. 정상까지 올라가 내려가는 것과 낮은 부분인 고개(재)를 넘는 방식이다. 이 글은 후자에 속한다. 불교와 장자, 선사의 어록을 길로 삼을 뿐 사상을 논하자는 글이 아니다. 설화의 내용과 그것을 담았던 사람과 사찰의 공간을 찾아가려는 글이다.


길이 만들어지는 두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이 먼저 걸었는데 그 발걸음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생긴 개인 삶과 관련된 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마을을 연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길이다. 전자의 길이 개인 생활을 위한 길이라면, 후자는 국가의 세금과 관련된 길이다. 전자의 길이 장자의 길이라면, 후자의 길은 공자, 노자, 맹자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길이다. 그래서 공자와 노자는 그 길의 문(門)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이 글은 다스려졌던 그 문을 넘나들던 개인들의 걸음을 따라가는 글이다. 그 길 위에서 그들이 남겼던, 장자 윤편의 이야기처럼 사찰 설화에 담긴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담아낸 보잘것없는 글이다.


나무가 떨어뜨리는 열매와 잎이라는 두 가지다. 열매는 또 다른 나무의 시작이 되게 하려는 것이고 잎은 자신의 뿌리를 감추게 하고 영양분을 뿌리에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나무와 열매가 역사라 한다면 뿌리는 문화적 토대다. 잎은 그 중간에서 자양분이 되게 하는 찌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찰 설화를 해석하는 이유는 뿌리와 나무라는 문화와 역사의 자양분이 될 것이란 나뭇잎 크기의 작은 생각에서다.


세계문화유산에 한국의 사찰들이 포함되었다고 많은 분들이 찾으시지만, 이런 글보다는 직접 사찰을 찾으시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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