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쌍계사 설화
쌍계사
쌍계사는 관촉사의 은진미륵석상을 조성한 시기(고려 광종 968년)에 혜명대사에 의해 백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출발했다 전해진다. 조선 영조 15년(1739년)에 세운 중건비가 있고,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에서 마곡사의 말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옥황상제의 아들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창건설화뿐만 아니라 쌍계사에는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마비설화
옥황상제가 산세와 풍수 좋은 곳에 절을 짓기 위해 아들을 내려 보냈다. 아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지금의 쌍계사터가 마음에 들어 지상의 인간들에게 절을 지을 목재와 부재들을 가져오게 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가져온 목재와 부재는 산더미 같이 많았다. 사찰을 세울 장인들을 불러 모았다. 장인들은 엄청난 양의 목재와 부재들을 보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옥황상제의 아들이 하늘에 물어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인들도 옥황상제의 아들을 돕기 시작해 드디어 사찰은 완성되었다. 절이 완공되자 옥황상제의 아들은 두 계곡이 만난다는 의미인 쌍계사雙溪寺라 이름 지었다.
먼 훗날,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전국의 스님들과 사람들이 이곳 쌍계사로 몸을 피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쌍계사를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주지스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병사들이 오는 쪽으로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독경 소리는 점점 커지고 멀리 병사들에게 도착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제자리에서 멈추고는 앞다리를 든뒤 모두 쓰러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말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말에 깔려 죽었다. 기병들이 죽어가는 것을 본 병사들은 겁을 먹고 쌍계사로의 행진을 멈춰 돌아가게 되었다. 그 이후 병사들이 말을 타고 죽어간 그 자리에서는 주지스님이 독경을 하지 않아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말이 쌍계사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자리에 말에서 내려 쌍계사로 가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졌다 전해진다. - 논산 향토자료
해설
마을에 수명이 둥구나무(오래된 나무)가 많았다 하여 둥구마을이라는 곳을 지나 불명산佛明山 자락의 쌍계사로 갈 수 있다. 오래된 나무가 많았다는 것은 사찰의 유지보수를 위한 나무를 마을에서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둥구마을에서 쌍계사까지는 얕은 경사가 있지만 평지를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높은 산 중턱에 자리한 사찰보다 찾는 이가 많았을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사찰의 규모가 커지기는 하겠지만 속세에서의 승려에 관한 이야기와 가족들에 관한 소식도 쉽게 들어오기 마련이다. 하마비라는 말과 아주 유사한 말이 하마평下馬評이다. 관리로 임명된 자가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관청에 들어가며 말에서 내려 들어가면 태우고 온 마부들이 관리에 대해 이러저러한 평을 했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하마비는 하마평에서 비롯된 설화일 것이다. 속세를 떠나 왔으니 쌍계사 안으로 속세의 일이나 하마평을 들이지 말아달라는 호소인 것이다.
대웅전 파랑새 설화
쌍계사 대웅전은 건축물 자체로서도 아름답기도 하지만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삼불상 위의 닫집은 정교함과 아름다우며 벽화와 탱화는 인간의 솜씨가 아닌 하늘에서 보낸 파랑새가 붇을 물고 그렸다는 설화가 전해질 정도로 아름답다. 창건설화와 대웅전설화의 공통점은 불교의 신앙대상이 아닌 도교의 옥황상제와 하늘과 연결되었다 생각했던 전통신앙의 파랑새다. 그런 점에서 쌍계사는 옛 전통신앙지에 지어졌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 한다.
전통신앙지나 다른 종교 지역에 사찰을 짓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진도 첨찰산 쌍계사의 창건설화가 그렇다. 범우스님이 사찰을 짓기 위해 진도를 돌아다니다 유림들이 향교를 지으려는 곳이 알맞은 장소였다. 범우스님은 제자와 함께 그곳에 개토제(지신과 산신에게 지내는 건축제례)를 지내려 했다. 그러자 유림들이 반대에 나섰다. 그러자 범우스님은 지금의 진도향교자리를 정해주고 쌍계사를 지었다 전해진다. 전통신앙지 뿐만 아니라 유교의 제례지인 향교터에도 사찰이 지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두 계곡이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인 쌍계雙溪는 불교와 전통신앙, 혹은 불교와 유교라는 사상이 만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칡 기둥
대웅전에는 병자가 만지면 치유된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광택이 나는, 칡 줄기로 만들었다는 기둥이 있다. 이런 목재로는 통상적으로 기둥으로 삼지 않으나 쌍계사 대웅전은 지붕을 떠 받치는 기둥으로 삼았다. 이 기둥에 대한 해석은 지리산 쌍계사의 창건설화를 통해서 해석할 수 있다.
"육조 혜능대사를 흠모하던 삼법스님은 혜능이 입적하였다는 소식에 한탄하였다. 익산 미륵사의 규정스님이 당에서 혜능이 지은 법보단경을 가져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규정에게서 법보단경을 얻어와 읽던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내가 간 후 몇 년 후에 내 머리를 취할 사람이 오리라". 삼법스님은 당에 가서 혜능의 정골을 가져올 것을 결심한다. 김유신의 부인 법정과 경주 백률사의 대비스님, 상인 장정만에게 도움을 받아 혜능의 정골을 얻어 올 수 있었다.
혜능의 정골을 모실 곳을 찾던 중 꿈에 한 선사가 나타나 "강주(진주)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눈속에서 칡꽃 핀 곳)"에 모시라는 말을 전한다. 한 겨울에 지리산을 찾은 삼법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했다. 큰 석문을 지나니 그곳에 칡꽃이 피어 있는 것이었다. 삼법은 그곳에 옥천사라는 절을 짓고 혜능의 정골을 석함에 봉인하여 모셨다."
해설
칡이 지리산 쌍계사에서는 설화에 논산 쌍계사에서는 기둥으로 되어있다 해서 지리산 쌍계사의 설화를 대입해 논산 쌍계사의 칡 기둥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칡이라는 뒤틀림에 선사들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선사들에게 병이 났다는 것은 깨닮음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수행 방식을 말한다. 근본부터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을 한다는 의미다.
나무를 관찰해보면 가로수건 숲의 나무건 뿌리가 손상되면 뿌리부터 나무 전체가 틀어진다. 시작이 어긋났으니 끝도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번뇌에서 맴도는 것을 수행자들의 병이니 그것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근본을 바르게 한다면 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칡의 꽃이 피는 시기는 칠팔월이다. 엄동설한에 칡의 꽃이 핀다는 것은 시절인연에 맞지 않은 일이다. 도(깨달음)는 시절인연에서야 이루어지는데 당시의 수행자들은 게으르거나 성급함의 병증에 걸려있어 육조 혜능의 근본을 통해서 시절인연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설화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