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창건설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전해진다. 중국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온 의신조사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을 지을 곳을 찾아다니다 노새가 이곳 법주사 자리에서 울며 멈춰 서자 의신조사가 살펴보니 절을 짓기에 알맞은 곳이라 생각해 불법이 멈춰 선 곳이라는 법주사라 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의신조사가 아닌 진표율사의 창건에 더 무게를 두어 전한다. 아마도 의신조사가 작은 암자를 지어 수행을 했던 곳에 구산문의 개산조 스승인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과 다름없는 창건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떠나 지금의 속리산(당시는 구봉산이라 불리었다)으로 넘어가다 쉬고 있는데, 누구가 수레를 끌고 가고 있었다. 수레를 끌던 황소는 진표율사를 보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수레 위에 있던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진표율사를 보고
"소가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스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중인데 미륵보살의 계법과 간자를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 금강산으로 가는 중이오. 소는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앉아 우는 것이오."
라 답했다. 이 말을 듣고 그가 말하길
"짐승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신앙심이 없겠습니까?"
그러면서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진표는 그의 머리를 마저 깎아주고 계를 받게 하였다.
속리산 골짜기에 다다른 진표율사는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그곳에 표시를 해 두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금강산에서 불법을 닦은 지 7년이 지나자 속리산에 있던 영심, 융종, 불타 등의 제자들이 찾아와 진표에게 법을 구하였다.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교법에 따라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전하시게!"
영심, 융종, 불타는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지금의 법주사인 길상사(吉祥寺)를 세워 점찰법회를 열었다 전해진다.
고려 인종대에 김부식은 속리사에서 점찰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38년(1605년)에 사명대사에 의해 중창되기 시작하여 인조 4년(1626년)에 완공되어 법주사라는 기록을 보아 고려 인종 이후 속리사라 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법주사라 칭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길상사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이전이어야 한다. 진표율사의 창건설화 해서근 그래서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속리사가 아닌 길상사 창건설화를 쓰게 된 이유를 밝히는 작업이다.
길상초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첫 번째는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수행할 때 깔고 앉았던 길상초라는 풀을 의미하며, 두 번째 의미는 장자 인간세편에 나오는 공자가 제자 안회에게 말하는 구절의 의미다.
허실생백虛室生白, 길상상상吉祥止止, "텅 빈 방이 훤히 밝지 않은가, 그곳에 길함이 머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불법으로 훤히 밝아 불심이 머무는 곳이 법주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법주사 안에는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후자의 것은 조선후기 벽암선사가 이곳 법주사를 중건하며 가져다 놓은 쇠솥이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를 중건하며 벽암선사는 돌 항아리를 화엄사 앞에 묻었다면 이곳 법주사에는 쇠솥을 가져다 놓았다. 대혜보각선사는 불심이 일어나는 곳은 그을음에서 불꽃이 튀어 일어난다고 말한다. 꼭 쇠솥 바닥을 볼 필요는 없다. 그을음을 찾아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을음에는 불이 붙지 않는다. 대혜는 장자가 말하는 타다 남은 재에 불이 붙지 않는 듯한 평정심을 말하는 듯하다. 그곳에 불심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 대혜는 말한다. 동요 없는 맑고 맑은 평정심에서 일어나는 불심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위해 벽암은 이 쇠솥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벽암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충해준 것이다. 일연이 보았을 법한 고려시대의 흔적이자 길함이 머물러 불심을 일으키는 곳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상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런데 마애불에는 그을음이 없다. 일연이 생각했던 그을음이란 마애여래의상의 그림자다. 그림자는 뒤 따르는 것이다. 뒤 따름은 과거 전생을 의미하거나 족적을 의미한다. 마애여래의상에는 분명하게 발이 조각되어있기 때문에 전생이나 세속에서의 인연을 의미한다. 전생이나 세속 과도 인연이 끊어진 공한 마음의 존재라야 그을음에서 불꽃이 튀듯 불심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연화대
그런데 마애불은 의자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다리 네 개인 사람들이 앉는 의자이거나 부처가 연화대다. 먼저 일반적인 의자라는 의미라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말하고 있다. 많은 수행자 중 하나였던 싯다르타가 그중에서 먼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우연적 사건을 접했기 때문이다. 마애불이 만약 일반적인 의자를 앉아 있다고 보인다면, 사성제인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우연적 사건을 만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같은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우연을 만날 수 없는 반복적 학습에 불과하다. 깨달음은 학습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자신의 본심을 우연히 들여다 보는 순간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평생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수도 있고, 잠시의 수행으로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다른 해석은 의자의 다리가 하나인 연화대다. 연화대라면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승려가 습득에게 부모가 누구인지 물었을 때 습득은 가지고 있던 빗자루에 자신의 머리를 괴어 답한다. 유교에서의 근본은 조상이지만 불가에서의 근본은 출가자가 된다. 그것이 연꽃의 의미다. 연꽃은 근본이며 깊은 물속의 진흙탕 속에 있는 뿌리라는 것은 말단에 불과하니 세속의 인연에 흔들리지 말라는 의미다. 마애불이 앉은 의자는 연화대를 가르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게 할 단초는 국보 64호인 법주사 석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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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심, 융정, 불타라는 세 명의 제자가 길상사를 창건하였다 하는 것에도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영심에게는 공허한 마음이라는 의미이며, 융정은 화엄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는 화엄종을 의미하지만 법주사는 법상종의 종찰이다. 불타는 부처를 의미한다. 이 세 가지가 길상사에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 해석해 보라는 것이다. 유식불교인 법상종의 깨달음으로 자만하지 말고 공허한 마음으로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라는 일연의 생각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