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 누벨바그에 관하여
1950년대 후반 장 뤽 고다르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영화운동을 보여주는 영화 "필름 소셜리즘"은 예술이 그렇듯 관객들의 시선을 미래로 향하게 한다. 할리우드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첨단의 촬영기법과 현대적 시각 이미지로 미래를 보여준다면 누벨바그 영화의 하나인 "필름 소셜리즘"은 다양한 사상을 투입해 고전적 시각 이미지로 미래의 모습을 지성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장 뤽 고다르의 미래 제시는 지적인 성취들이 이뤄낸 과거의 감성적 이미지와 지성적 논쟁이 집약된 현재의 모습을 과거로 만들어 관객의 시선을 미래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고다르의 영화는 과거를 확인하게 한다. 현재를 끝없이 과거로 만들어 관객들이 현재를 빠져나가 미래에 도달하게 하려는 방식이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는 산란 후 죽는다. 하지만 그들이 낳은 알들은 부화하여 다시 바다로 향할 것이다. 연어의 삶에서 선명하게 각인된 회귀본능은 수만 년의 세월이 빚어낸 감각적 투명성에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관객들에게 감각적 투명성으로 미래를 제시한다면 장 뤽 고다르는 거기에 지성의 투명성을 더해야만 감성과 지성의 균형을 통해서 미래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누벨바그의 핵심 사상이다. 누벨바그 운동의 블록버스터라 할 수 있는 "필름 소셜리즘"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해 보려 한다.
개인의 문제라도 사회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고민은 각 개인들에게 돌아간다. 사회 문제이자 개인의 문제는 자유와 평등의 토대에서 해결이 요구되고 있다. 장 뤽 고다르의 2010년작 "필름 소셜리즘"은 사회주의적 요구들이 누구에게서 나오고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관한 내용을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라는 3대 비판의 틀에 낭만주의에서부터 시작해서 상징주의의 영상적 형식으로 표현한, 문학이자 회화이며 동양 고전인 장자의 철학까지 담아낸 작품이다. 이렇게 말하면 영화 보기가 꺼려지겠지만, 영화도 하나의 시각적 읽을거리라는 것을 장 뤽 고다르는 필름 소셜리즘으로 보여주려 한다. 칸트라는 포장물 안에는 프랑스의 문학과 미술에서의 사상적 흐름과 동양의 장자 철학을 만나게 된다. 단 한 번으로 독파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독서와 사색의 시간에 따라 보이는 것이 많아지는 관객의 성장을 요구하는 영화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역객선의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들이 각 개인들의 문제로 좁혀지는 전반부와 한 가정의 문제에서 사회의 거대담론으로 커져가는 후반부로, 영화는 마치 시간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모래시계를 평행으로 뉘어 놓은 모습이다. 감독은 100분의 러닝타임에 담아 둔 영상을 시간이 정지된 상태로 영원히 남기고 싶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고민들은 국제 분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중동과 아프리카, 그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유럽의 세계대전 이후의 시선인 전반부와 프랑스의 한 가정의 모습을 통해 프랑스의 세대 문제를 다룬 후반부로 나뉜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세계와 유럽의 무거운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관해 유럽인들에게 묻고 있다. 유럽인이 아니더라도 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영화다. 고다르가 제기한 과거 역사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인들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지금도 국제정치 문제와 국내 정치문제를 다루고 있다. 매일 뉴스를 본다고 해서 전 세계 사람들이 그 문제를 자기 문제화할 가능성은 없다. 먼 어느 나라의 나와는 관계없는 문제로 생각하기 쉽다. 고다르는 그 무성의한 시선에 영화를 통해 자극을 주고 싶어 한 것이다. 아프리카와 중동, 유럽 사회와 개인들의 문제들이 다른 듯하면서 해결책의 부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다. 문제 해결 방식의 차이 때문에 내부적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지만 집단 지성이 해결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주의로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며 최종적으로 망각에 기대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달리해 그 문제들이 재현되고 환원된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영화는 환기시키고 있다.
소냐 테르크 들로네 부인의 작품에 시인 아폴리는 오르피즘이라며 찬양했다. 류트를 연주하고 시를 낭송했던 그리스 시인 오르페우스처럼 색채를 원형의 운율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색이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시적 운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들로네 부부의 작품을 통해서 영화는 시적 추상의 세계임을 밝힌다. 추상의 세계에서 각각의 논쟁들을 뒤섞어 보여준다.
그림이 종교적 숭고함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아내야 한다는 관념이 여전했던 1800년대, 마네가 처음 이 그림을 전시했을 때에는 부도덕함을 담았다며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옷을 걸치지 않은 여성의 몸을 그린 것 때문이 아니라 돈을 받고 몸을 팔았던 그녀들의 직업이 문제였다. 품위를 위해 어느 누구도 이 그림을 자신들의 집에 전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 그림을 비난하지 않는다. 문제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뿐더러 용납되기도 한다.
영화 속 몇 장면은 인상주의 화풍으로 제작했다. 장면을(필름이 훼손된 듯한 회화적 표현으로 촬영된) 보면, 노인이 아주 젊은 여성과 함께 배에 오르고 있다. 이 둘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용을 지불했으며 승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커플의 부도덕함을 지적하며 다른 승객의 품위를 손상시킬 수 있다며 승무원이 승선을 거부하고 환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돈 많은 노인의 자본주의 전리품(전쟁에서 승리하고 적에게서 빼앗은 물품) 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상에서 노인은 2차 대전 때 전쟁에 참가해 적(소련군)에게서 빼앗은 금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이었다.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기자와 금의 주인이었던 손녀가 찾아와 진실을 요구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전공을 자랑할 뿐이다. 추악한 탐욕은 잊히고 전쟁 영웅으로 기억될 망각의 시간만을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사실로 기억하는 방식임을 말한다. 영웅과 악당의 사이에 있는 이 노인을 잊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고다르는 영화에서 문제의 발견, 문제에 관한 세심한 응시, 문제에 대한 시선의 높이에 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회화적 시선으로 장면을 채운다면 배우들의 대사는 장자 철학이 배우들의 대사나 몸으로 쓰인 점이다. 그중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주의적 말들의 비판이다.
서양철학이 기본적으로 동일성을(identity) 사유했다면 중국 철학은 관계(relation)를 사유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서양철학이 아버지가 아버지일 수 있는 동일성을 묻는다면, 중국철학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관계와 같은 관계성을 묻는다. - 중략 - 그래서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서양철학의 진리가 빛이나 태양으로 상징된다면, 중국철학에서의 진리는 태극무늬로 상징된다.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동양의 논리를 찾아서 1.
아이가 막대기를 휘두르다 잠이 든 장면을 보자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형이 하학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리스의 모습을 몽환에 빠진 아리스토텔레스로 형상화했다. 고다르는 왜 그랬을까.
손가락으로써 손가락을 손가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손가락을 손가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못하다. 말馬로써 말을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으로써 말을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며, 만물은 한 마리의 말이다. 출처 장자, 이민수 혜원 출판사
말이 진리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통해 획일성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지록위마, 모두가 사슴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환관 조고가 무서워 말이라 했다는 사기의 이야기처럼 어떤 존재는 존재가 표현하는 것과는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 언어의 한계다.
영화에서는 이것을 재미나게 표현했다. 당나귀와 라마, 그리고 자동차 중에서 말에 가장 가까운 개념은 마력으로 성능을 표현하는 자동차다. 지록위마의 일이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조고와 같이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것을 매일 접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더더욱 지록위마의 이야기는 가깝다.
한 남자가 창을 팔고 있었다. "이 창은 무엇이라도 뚫을 수 있는 창이오". 잠시 후에는 자신이 파는 방패를 들고는 "이 방패는 무엇이라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요". 그러자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창으로 그대의 방패를 찔러보면 어떻소". 뚫리지 않는 방패와 못 뚫는 것이 없는 창은 세상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한비자 난일편의 이야기다. 하지만 모순적인 것은 분명 존재한다.
경매가 천억 원을 넘는 르누아르의 그림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림의 가치를 결정하고 값을 지불하게 하려면 구매자의 환상을 자극해야 한다고 어느 경매인이 말했듯이 르누아르의 그림에는 영원한 환상이 담겨있다. 젊음의 푸른 환희와 갈망이 영원히 지속되는 영원성이라는 환상. 노인들이 대부분인 크루즈의 식당 모습을 보면, 최소한 저들보다 젊다면 저 자리에 끼여 함께하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늙어 죽는다는 것은 사회에 저항하는 행위가 아니라 환경과 체제에 적응하고 순응한 결과다. 오랜 생의 경험을 통해 체제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체제를 변화시키거나 전복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노인이 되면 체제를 변화시키거나 개선시키기보다는 유지하려 한다. 체제의 변화가 가능해지는 미래를 갈망했던 젊음은 사라지고 체제의 부당함이 유산처럼 대물림된다. 늙음에 젊음이 대항하고 투쟁하여 사회 변화가 이루어진 것보다는 역설적이게도 더 오래된 예술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당대에 사회 변화에 영향을 주지 못한 소수의 시선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대중적이 된 후에는 변화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예술과 고전은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나눠지고 축적되어 힘을 갖게 된다. 고다르는 인상파와 추상파, 상징주의의 화가들의 시선과 동양 고전인 장자를 통해서 그것을 말하고 있다.
첫 장면에서의 이미지다. 물이 흑백일 때는 일렁이다 색을 만나 격렬한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인상주의 이전까지 그림은 도덕적 체계의 빛깔이어야 했다. 빛깔이라기보다는 선과 악, 흑과 백처럼 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야 했다. 그것이 삶의 빛이었다. 극도의 종교적 도덕주의와 금욕주의의 아니라면 색은 의미 없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고전주의를 거쳐 문화의 중심이 시민들에게 넘어간 1800년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간의 이상적 생각이 담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연의 색이 인간의 마음을 격렬하게 자극하는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 첫 장면은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시선과 색을 등장시키기 위한 밑바탕 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다르는 너무 밝은 면만을 그려냈다고 르누아르의 시선도 칭찬하지 않는다. 이 지나친 낙관주의적 시선이 어쩌면 세상을 잿빛으로 물들게 한 세계대전의 밑바탕이 된 것일 수도 있다는 듯 지성과 감성의 균형점을 찾게 하려 한다.
사물은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저것은 저것의 입장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것으로서 알게 되면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는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설이다. 그러나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다. 가능한 것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가능한 것이 있다. 그래서 성인은 이 같은 것에 의거하지 않고 그것을 자연에 비추어 본다. 이 또한 옳음에 의한 것이다. 저것도 한 가지의 시비이며, 이것도 한 가지의 시비이다. 저것과 이것이 있는 것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의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추道樞라고 한다. 중추中樞로 있어야 원의 가운데에 자리하면서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옮음도 하나의 무궁한 변화이며, 그름도 무궁한 변화다. 그러므로 밝은 지혜로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장자 제물론편
벽을 넘나들게 하는 것이 문이다. 문은 벽의 틈 크기를 정한 문틀과 통로를 채우는 문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틀과 문짝을 연결해야 비로소 문이 되게 하는 것이 지도리樞(경첩)다. 장자는 인간의 도는 둥근 문과같이 편벽 해지지 않아야 하며 벽이 문을 통해서 열리고 닫힘이 지혜로서 이루어지게 하는 지도리에 있음을 주목한다. 단지 소통이 필요하다거나 잘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지도리에 의해 성립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지도리는 관계다.
공자와 노자는 장자와는 다르게 문을 중시했다. 도는 그 문을 왕래하는 것이니 그 문을 잘 다스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관계를 소홀히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자는 왕과 신하,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관해서 말하기도 했으며 노자는 크고 작음, 위와 아래의 관계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서양 철학적 상대적인 개념들에 의해 시비 다툼을 끌어내지 말고 동양 사상가들이 주목한 관계의 논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감각이 열리고 닫힘이 있어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개념에서 만들어진 자신들의 말들을 해체해 보면 어떨까 고다르는 제시한다.
악기를 든 열여덟 명의 소녀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사실 소녀들은 계단을 내려가고 있지 않다. 각각의 얼굴들은 번존스의 친지에서 가져왔지만 모델은 안토니아 카이바 단 한 명이다. 모델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정지한 포즈를 계단으로 옮겨 놓은 것뿐이다. 그럼에도 관람자는 움직이는 소녀들로 해석한다.
인간의 내면에서도 연어와 같이 감각적 투명성을 가지고 있다. 연어의 감각적 투명성이 죽음을 불러온다 할지라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도 감각적 본능이 있다. 고다르는 그것을 한 엄마의 모습으로 설명한다. "왜 엄마의 역할을 하냐고요? 엄마니까요". 어미가 되는 순간 어미의 역할을 하게 된다. 어미라는 역할은 교육받아서가 아니라 출산과 더불어 감각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번존스의 황금 계단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지성이 확인해 주지만 감각적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 또한 인정되어야 한다는 두 해석이 모두 정당하다.
색은 그 자체로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을까. 보라색은 여전히 차갑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그 느낌 이면에는 보라색 할미꽃이 반원의 무덤 위에 피어 있던 모습을 본 어린 시절 경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무덤이라는 이미지와 결합된 보라색은 여전히 그 느낌이다. 노란색은 불쾌함이었다. 노랗게 핀 민들레가 핀 자리는 소의 똥이 떨어진 자리였다. 노란색을 보면 소의 똥이 연상되고 노란색이 붙어 있는 곳은 소의 엉덩이를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란색은 어느새 그것과 결별하고 가을을 채색하는 색이 되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불쾌감을 주었던 노란색이 아름답게 보아야 한다는 의지 작용이 내면에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다르는 부도덕한 소녀를 통해서 도덕적인 것이라는 것은 의지의 지속적인 작용의 진행형일 뿐이지 결과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소녀는 노인에게서 얻은 황금 목걸이를 물속에 던져 넣는다. 소녀의 몸은 도덕성을 회복하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도덕성을 잃지 않았으며 더 숭고한 순수의 모습으로 태어나는가. 인간의 지성은 의지와 시대와의 작용일 뿐 미래까지 도달할 수 있는 정당성을 획득한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감각일 수 있다고 제시한다.
장주(장자의 본명)는 집이 가난해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감하후가 말하길"내가 봉읍(제후의 땅)에서 돈을 받아들이려 하는데, 3 백금을 꾸어주면 되겠는가?" 이 말을 들은 장자는 화를 내며 장주가 감하후에게 말했다."어제 여기에 오는 도중에 누가 부르기에 돌아보았더니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에 한 마리의 붕어가 있길래 왜 그곳에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붕어가 대답하기를, " 저는 동해의 파신인데 한 말이나 한 되쯤의 물이 있다면 제게 부어 살려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저는 붕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남쪽으로 오나라와 월나라 땅으로 가서 서강의 물을 터놓아 너를 맞아가게 할 터이니 그리하면 되겠느냐?" 그러자 붕어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저는 지금 있어야 할 물을 잃어서 있을 곳이 없습니다. 저는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시니 건어물을 파는 곳으로 가서 저를 찾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장자 잡편, 외물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야 비로소 물의 존재를 알게 된다. 감하후도 부에서 떠나서야 장주의 빈곤을 이해할 수 있다. 외물의 것이 닥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젊음을 잃어서야 젊음을 찬양하면서 노화를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젊음의 샘물을 마셔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대주의적 언어에 의문을 제시하지만 나를 떠난 타자와의 조우는 나를 떠나 타자의 입장에서 나와 타자를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긍정된다.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다시 처음과 연결된다. 영화의 과정과 같이 생각과 감정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처럼.
누벨바그에 관한 일반적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누벨바그 영화를 접하는 것이 문자적 해석보다 명확해질 수 있다. 누벨바그 운동은 말 그대로 운동이다. 정의를 내림으로서 운동은 죽는다. 살아 있다고 하면서 죽이는 꼴이다. 운동에 참여해 보기를 원하지 보편성의 전시관으로 박제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것이 누벨바그 운동, 새로운 물결의 운동성이다. 누벨바그의 외형을 표현하자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닷 물결과 같은 풍부한 운율과 색채로 세계를 채우려는 현상이자 영원히 진행될 의지 작용이 될 것이다.
영화도 예술작품처럼 다가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시각적으로 곧바로 어떤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인내의 응시가 필요하기도 하다. 영화와 예술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을 응시하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각각의 표정과 말에서 의미를 찾으려 모든 감각과 지성을 동원하는 태도를 통해서 접해야 하는 것이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일 듯싶다.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편이라면 추천할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도전해볼 가치는 있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어리숙 하게 말을 건네는 듯하겠지만.
이 글은 대략 20 장면을 선별하고 그 중에서 몇 개의 사진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이 글에 소개하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가 누군가가 찾아 내기를 바라는 숨은 그림처럼 누군가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