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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꼭그래 Oct 21. 2018

Errementari, 악마와 대장장이

영화가 재미없다면 의미라도 찾자

※ 주의 :  이 글에는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rrementari, 악마와 대장장이


늦은 밤, 마을 사람을 죽이고 소녀 우스에를 감금하고 있는 대장장이 파치를 찾아간다. 정의를 위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대장장이 파치가 군에서 탈영하며 다량의 금을 훔쳐 대장간에 비밀리에 숨겨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수사하러 온 지방 수사관 알프레도 오르티스의 수사문건을 보게 된 마을 사람들은 전에는 가기를 꺼려하던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장장이 파치가 숨겨온 것은 지옥의 악마 사르티엘이었다. 전쟁터에서 아내가 있는 집으로 살아서 돌아간다면 악마 사르티엘에게 자신의 영혼을 주겠다는 거래를 했지만 파치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그를 가둔 것이다. 

지방 정부 수사관 알프레도 오르티스의 정체는 지옥의 악마 알라스토르였다. 대장장이 파치의 영혼을 지옥으로 가져가지 못한 책임을 물어 악마 사르티엘의 계급이 강등되었음을 전하고 사르티엘을 대신해 파치의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대장간을 지키려는 파치와 소녀 우스에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그의 대장간을 파괴하고 금을 찾아 내려는 마을 사람들. 악마들의 접근을 막아 놓은 대장간을 접근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탐욕을 이용해 파치의 영혼을 데려가려는 악마 알라스토르. 악마와 대장장이의 대결이 펼쳐진다.


여기까지가 외환위기(IMF, 경제위기, 강두식 시대라 불리는 1998년 이후) 이후, 영화의 스토리적 재미를 추구하는 대중의 기호에 맞춘 광고 카피 방식의 영화 소개다.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미끼로 시작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고 궁금증을 유발할 정도만 소개될 뿐이다. 이런 방식의 영화 소개 방식이 유행하게 된 이유는 많겠지만 제일 먼저 손에 꼽으라 한다면 너무 많은 영화들이 제작되었고 관객들은 그 영화 중에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고 재미있는 영화만을 찾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적 재미에 있어서 한국인들은 대체로 스토리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래서 영화 소개 글이나 리뷰라는 글들이 대부분 스토리 위주의 광고 카피 형식의 자극적 설명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또 대중의 기호에 맞아서인지 찾는 사람이 많다. 이 글은 시대 흐름에 맞춰 스토리적 재미를 판별해 주는 글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주려는 글이다. 그렇기에 재밌는 정도를 묻는다면 영화 "악마와 대장장이"는 재미없는, 심지어 잘 만들지도 못한 영화다. 재미는 없다 하더라도 의미마저 없다면 정말 시간 낭비였겠지만 다행히도 이 영화는 무척 진지한 의미를 담아내려 했다. 그 의미가 너무 거대 담론이라서 문제지만 말이다.


스토리 혹은 메시지


스페인 인류학자 J.M 바란디아란의 단편 "대장장이 파치"가 원작이라고 밝힌다. 아쉬운 점이라면 스토리만을 가져와 북유럽의 토르 신화와 할리우드식 악령퇴치 콘스탄틴의 혼종(heterotopia) 액션 영화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보다 더 메시지를 담아내는 작가주의 영화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액션도 없으며 그렇다고 메시지의 전달에도 성공적이라 할 수도 없다. 감독은 스토리와 메시지의 균형 잡힌 영화를 지향했겠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것 같다. 액션이 주는 재미가 없다면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관객에게 전하려 하는 메시지의 의미다.


순수 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의 비판을 통해 현대 미학의 새 장을 연 칸트의 통찰을 1800년대의 고야의 시선으로 담았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의 핵심 재료인 철의 이중성으로도 말하고 있다. 영화 한 편에 담아내기 버거운 주제를 용감하게 작업했으나 그리 좋은 결과물은 아니다. 바란디아란의 원작 "대장장이 파치"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 재미를 많이 덜어 낸 듯한 영화다.


고야의 시선

얼굴 없는 민중의 얼굴을 그린 최초의 민중화가로 평가 받는 하는 스페인 아라곤 출신의 프란시스코 고야(1746 ~ 1828년)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맨 우측)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고야의 작품에서는 멀리 교회 종탑이 무고한 죽음에 관해 종교적 침묵을 보여주고 있다면 영화에서는 신부가 직접 등장하며 무고한 죽음에 종교가 동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야는 스페인 성직자들이 인간의 구원보다는 악마와 마녀에 빠진 것을 비난한 판화 카프리초스를 발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야가 보았던 당대의 정치와 종교적 상황은 타락했던 것이다.

고야, 카프리초스, 출처 구글 이미지

당시 고야가 목격한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반도 전쟁을 통해서 스페인 민중들의 고난과 죽음을 고야의 시선으로 담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크로노스 신화


고야,  사투루스(크로노스), 출처 구글 이미지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신 가이아는 결혼하게 된다.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 눈이 하나 달린 키클롭스와 팔이 백개가 달린 헤카톤게이에스와 같은 이상한 모습의 아이들도 태어난다. 우라노스는 자기 자식이 아닐 것이리며 그들에게 폭행과 감금을 일삼는다. 그런 우라노스에게 불만을 가지게 된 아내 가이아는 자식들에게 우라노스를 하늘의 신에서 몰아낼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자식들은 아버지 우라노스가 무서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중 막내였던 농업의 신 크로노스가 어머니 가이아의 말에 따라 아버지를 몰아내기로 한다. 어머니가 준 낫을 가지고 침실에서 기다리던 크로노스는 가이아와 잠들려는 우라노스의 남근을 자른다. 우라노스는 상처를 입고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되며, 우라노스의 잘린 남근이 바다에 떨어져 정액이 바다에 뿌려지자 아프로디테가 태어났으며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이혼과 같은 갈라섬으로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게 됐다. 아들 크로노스도 자신과 같이 자식에게 죽임을 당할 거라는 저주를 내리며 우라노스는 왕좌에서 물러난다. 그 뒤 아버지를 대신해 왕좌에 오른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으며 죽지 않으려 했지만 막내아들인 제우스와의 전쟁에서 패해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처럼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된다.

대장장이 파치와 우스에


살아서 아내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것이 악마 사르티엘과 대장장이 파치의 거래 조건이었다. 파치가 아내를 살아서 만나기는 하지만 그의 아내는 파치가 전쟁 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운 남자와 가정을 꾸렸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우스에였다.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것에 분노한 파치는 아이를 불구덩이에 던지려 하자 파치를 말리려던 새 남편은 죽게 되고 아내는 자살을 한다. 파치는 우스에를 성당에 맡기고 타르타노스와 같은 대장간에서 은둔하게 된다.


스페인의 참혹한 현실과 국민들의 고통을 보면서 고야는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루스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스페인의 현실이 아이들의 미래를 잡아먹는 디스토피아적 시선, 사실과 현실을 넘어선 참혹한 미래의 시선을 사투루스를 통해서 그려낸 것처럼 대장장이 파치가 우스에의 왼쪽 뺨에 남긴 화상흉터의 흔적은 고야의 시선처럼 기성세대들이 미래세대에게 주는 상처다. 기존의 정치, 종교, 윤리적인 기성세대들의 가치관은 우라노스의 저주를 미래세대들이 운명과 같이 받아 들이이라는 강요였던 셈이다. 


지옥, 타르타노스(카오스)



한 남자가 죽어 하늘로 향했다. 천국의 문과 지옥의 문 앞에서 죄의 무게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천국의 문 안쪽으로 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지옥으로 향했다. 그의 순서가 됐다. 천사가 말했다. "당신은 죄가 너무 무거워 지옥으로 가야 됩니다." 천사의 말이 떨어지자 지옥문으로 향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는 한 넓은 벌판에서 깨어났다. 천사가 분명 지옥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깨어난 곳은 천국처럼 보였다. 넓은 벌판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고 몸은 고통 대신 활기가 넘쳤으며 배고픔도 없었다.  지옥은 예상보다 아름다웠다. 악마들의 가혹한 체벌도 없었으며 지옥불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없었지만 걷고 또 걸으며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생명체라는 것이 없었다. 피곤하지도 않으니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원히 혼자였다. 그는 그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내가 있어도 자신조차도 "의미 없는 곳", 지옥은 그런 곳이었다.


의미는 부여한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것이 지옥에서 한 발짝 떨어진 지상세계이자 파치의 대장간이 갖는 공간적 의미다. 대장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가 파치가 겪게 될 운명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의 공간이 될지 소멸의 공간이 될지는 부여된 의미에 의해 결정된다. 그 역할은 현재를 낳은 기성세대인 마을 사람들이 아닌 미래세대인 우스에의 역할이다. 우스에의 시선은 칸트적이다.


칸트적 시선


현대 미학은 칸트적 통찰에서 비롯된다. 종교적 신성함이 미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진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는 칸트의 지적에서 미학의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을 지지하고 그들의 생각에 동의했던 고야지만 프랑스군이 보여준 잔혹성은 진실, 정의, 아름다움과는 괴리가 있었다. 고야의 시선을 배경으로 한 것도 칸트적 시선을 지지하기 위해서다. 그 페르소나는 소녀 우스에다. 아름다움은 추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장자의 통찰처럼. 우르노스의 잔혹성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역설을 처럼.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영화 전체를 흐르는 칸트적 시선이 주제다.


악마를 막기 위해 신성함의 상징인 십자가로 가득 채워진 파치의 대장간 주위의 모습이다. 신성함으로 가득 채워진 곳에 아름다움이나 선함을 느낄 수 없다. 종교적 신성함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미美의 관점에서는 아름답지 못하다.


거짓이 진실의 가면을 쓰는 방식은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방식과 추함이 아름다움의 가면을 쓰는 것과 같다. 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대장간은 해체되어야 하지만 그래서는 자신들이 죄를 짓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찾아낸 명분은 그동안 구박했던 소녀 우스에의 구원이었다. 구원조차도 성직자들의 탐욕이었던 고야 시대의 시선에 비친 종교적 집단 광기, 고야의 "산이시드르 순교행렬"의 빛깔은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의 빛깔이다. 오히려 화상을 입은 얼굴을 한 우스에는 악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으로 연결되었다고 악마 사르티엘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고야, 산이시드르 순교행렬, 구글 이미지

철, 혹은 인간의 이중성

자연이 주는 한정된 것으로 살아가던 인류가 철을 이용하여 스스로 식량을 만들어내던 시기를 신석기 혁명이라 하며 농업혁명이라 한다. 인류 문명의 1차 혁명을 이끌어 낸 것은 철이었다. 철은 인류에게 식량 생산량의 획기적 증대를 주어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했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기도 인간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낫과 망치, 혹은 낫과 칼이라는 철의 이중성 때문에 철은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철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었던 산업혁명 이전까지 미학적 재료로의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종교적 아름다움의 재료로 사용된 것은 종처럼 신의 소리 기호에 사용되기도 했다. 쇠가 달궈져 황금과 같은 색이라 하더라도 종교적 따뜻함이 아니라 뜨거운 느낌이며 식으면 차갑게 느껴진다. 대장장이 파치의 운명처럼 철은 종교적 따뜻함이나 미학적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풍요로움의 출발도 철의 대량생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에도 철은 오랫동안 신성함을 갖지는 못하고 생활 도구와 농기구, 산업 도구적인 일상적이며 평범한 것이거나 살인의 도구로 폄하되었다.


오랫동안 철과 마찬가지의 처지에 있던 것이 개인들의 평범한 일상이 펼쳐지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생명과 생각이 살아 숨 쉬는, 따뜻한 자기 몸이다.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타인의 몸도 뜨겁게 바라보다 금세 차갑게 식는다. 철의 이중성을 통해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몸을 철처럼 보고 있었다는 중세적 시선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몸의 시선에서 해방은 이루어지는가.


해방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부모를 죽인 파치를 살리기 위해 우스에는 사르티엘과 거래를 한다. 하지만 신부와 마을 사람들은 악과의 타협을 선택했다며 우스에를 나무란다.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엄마를 만나기 위해 지옥에 데려가 달라며 악마 알라스토르와 거래를 한다. 깨어난 파치는 우스에를 지옥에서 꺼내오는 조건으로 사르티르와 다시 계약을 맺는다. 악마 사르티르는 파치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우스에를 세상에 데려간다. 파치는 지옥에 남아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지옥을 파괴하려 종을 울린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차라리 지옥에 가서 신에게 버림받은 영혼을 구제하겠다.", 법정의 말과도 비슷한,  지옥을 파괴하는 것이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는, "대장장이 파치"의 원작자 J.M 바란디아란의 인류 구원과 해방에 관한 결론이다. 

새 한 마리가 어느 인가의 창문에 내려앉았다. 집 안에는 다람쥐 한 마리가 철창에 갇혀 있었다. 다람쥐가 새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여기 왔지?"

"매를 피해서!"

그러자 다람쥐가 새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 안에서 밖의 온갖 위험에서 벗어나 있단다. 사람이 오면 쳇바퀴를 돌리거나 장난을 하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단다. 매나 독수리에게 위협받으며 이 나무 저 나무를 오가며 힘들게 먹을 것을 얻지 말고 새장 안에 들어가지 그러니?". 창문에 앉아 있던 새는 아무 말 없이 날아갔다. 


영화에서 우스에의 해방은 칸트적이다. 악마 사르티엘을 가둬 둔 새장의 지붕, 벽, 기둥과 같은 진실, 선함, 아름다움의 기존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고야와 칸트의 새로운 시선이 인류에게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제시한 것처럼 우스에도 새로운 자유로운 시선을 통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영화가 재미가 없다면 의미라도 찾자


반복되는 일상에서 위안을 주는 것이 있다면 맛있는 음식이나 화려한 볼거리와 같은 감각적인 것들이다. 감각적인 재미는 필요하다. 하지만 매일 채워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기에 이것 마저도 감각의 감옥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주말에 시간을 내 영화를 보면서 의미를 찾는 것은, 반복되는 감옥 같은 감각적인 삶에서 벗어려는  날갯짓과 같다. 의식의 작은 날개로 명작을 탄생시킨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꼭 명작일 필요는 없다.


영화 "악마와 대장장이처럼"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더라도 이런 영화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일상을 사는 것과 같다. 졸작 같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순간순간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영화가 명작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을 통해서 세상과 나의 의미를 연결 짓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의미로 가득 채운다 해서 내 삶이 명작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따뜻한 시선으로 서로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우스에를 대신해 지옥에 간 대장장이 파치의 사랑이고 그런 시선을 통해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원작자와 감독은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고야에게 대답한다. 이성을 잃고 광기를 뿜어대던 인간들이었지만, 아직 인간은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다고. 스페인 스타일의 빛깔과 서사방식의 영화 "Errementari, 악마와 대장장이"의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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