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열린 결말
마틴 맥도나 감독의 2008년작 "In Bruges"는 한국어 제목 "킬러들의 도시"로 인해 스토리가 재미있다거나 화려한 액션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영화다. 감독부터 그것 과는 거리가 멀다. 출연한 콜린 파렐, 랄프 파인즈, 브렌단 글리스가 각각 레이몬드, 해리, 켄의 역을 하고 있어 액션 영화로 오인될 수도 있다. 주인공 레이몬드가 해리가 쏜 총탄에 맞아 구급차 천장을 보며 영화가 끝나는데 다른 영화에서도 사용한 방식이다. 응급실로 향하는 주인공 토니의 독백을 결말로 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1993년작 "칼리토"의 마지막 장면을 가져온 것이다.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서 주인공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객의 상상에 맡긴 열린 결말인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오마주로서 "브뤼헤에서"가 제작된 것이 아니다. 되 짚어 보면 마틴 맥도나 감독은 오히려 "대체 미국적 상황에서 관객이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라며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래서 열린 결말은 영화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있다는 생각이었는지 마티 맥도나 감독은 벨기에의 브뤼헤를 선택했다. 주인공 레이몬드가 죽을지 혹은 사랑하는 클로에와 행복하게 살게 될지의 관객의 상상은 벨기에의 도시 브뤼헤에 달려있다.
어린아이의 죽음을 통해 아이의 시선으로 극을 끌어 간다는 암시를 주는 것을 "필로우 맨" 효과라고 한다. 영화와 미술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영화 유전에서도 아이의 죽음으로 어른들의 가치판단이 아닌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영화를 보아야 한다는 암시 이기도 하다. 이 팔로우 맨 효과의 시작은 마틴 맥도나 감독의 2003년 희곡 "필로우 맨"에서 유래한다.
인생이 너무 힘들어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찾아가 어린 시절로 되돌려 보내 인생의 불행과 고난을 경험하지 않은 그 시절에 목숨 끊는 것을 도와준다. 그의 이름은 필로우 맨. 그가 일을 열심히 하면 어린아이들이 죽어야 했으며 그러지 못했을 때 아이들은 끔찍한 경험을 겪고 난 어른이 되어 자살을 해야 했다. 팔로우 맨은 그래서 웃는 얼굴이지만 마음속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소설 "필로우 맨"에서 필로우 맨이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의 죽음이 흡사해 살인자로 의심을 받은 작가 카투리안과 그의 형 마이클을 취조하는 내용의 연극 "필로우 맨"의 원작자이기도 한 감독 마틴 맥도나는 어린아이의 죽음에 관한 영감을 준 곳이 브뤼헤를 배경으로 한 "플란다스의 개" 일 수 있다고 짧은 단서를 넣어 놓았다.
플한다스의 개에서는 아이의 죽음이 극의 후반부에 등장해 관객이 아이의 입장에서 긴 슬픔의 여운을 갖게 한다면, 마틴 맥도나의 필로우맨 효과는 극의 초반부에 등장해 극의 긴장감과 시선의 예민함을 요구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절규하지만, 팔로우 맨에서는 "언제 죽을 것인가"의 고뇌다. 혹은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순수한 연민과 동정, 사랑의 시선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 필로우 맨 효과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플란다스의 개와 마찬가지다.
소년 네로와 파트라슈라는 이름의 개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국 소설가 위다(Ouida)의 1872년 소설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은 브뤼헤다.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마지막 순간에 본 것은 브뤼헤 안트베르펜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제단화인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였다. 소년 네로가 죽지 않고 살아간다면 "플란다스의 개"라는 소설은 큰 파장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잔잔하면서 넓게 그리고 심연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연약한 아이라는 낮은 시선에서의 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주인공 레이몬드에게 필로우 맨 효과를 입힌 채 바로크적인 "계속 저음"의 오프닝 음악으로 시작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24oVrjC2dP4&list=PL4Q6Ary6c3-tbhnIdqjnFWUorJ9XzxZSW
인구 약 11만 명의 작은 도시 벨기에의 브뤼헤를 모를 수는 있어도 그 도시가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한 도시를 알려면 길을 잃고 헤매어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다행히도 마틴 맥도나 감독은 친절하게 브뤼헤를 안내해 준다. 브뤼헤의 분위기는 바로크적이라 말한다. 레이몬드(콜린 파렐)와 켄(브렌단 글리스)의 대화와 함께 음악 감독 카터 버웰(carter burwell)의 계속 저음, 혹은 통주 저음이라 하는 음이 어떻게 연주될지는 연주자의 즉흑성에 달린 Medieval Waters가 흐르며 영화는 시작된다. 잔잔한 파동이 귀에 전달되고 내면에 파고들어 종교적 신비로 다가가려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흐르며 죽음과 종교에 관한 영화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르네상스의 음악 전통인 다성 음을 거부하며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시 낭송과도 같은 음의 계속을 통해서 브뤼헤를 바로크 적이라 설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보이는 브뤼헤라는 도시의 건축물들은 고딕적이다. 그런데 왜 바로크적인 음악으로 시작하고 있을까. 바로크라는 말 자체와 브뤼헤가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코라는 말은 불규칙한 모양의 진주를 지칭하는 포르투갈어의 보석 세공 용어 바로코 baroco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기원설이다. "잘 되어 있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으며 탁한 물로 만들어진 진주 바로코" 가르시아 다 오르타의 1563년 저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대화와 인도의 약품]에 적힌 "barroco"에 관한 기록이다. 훗날 barroco가 유럽으로 건너가 사물의 상태뿐만 아니라 이상하면서 다른 생각을 나타내는 바로크 baroque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778년 고고학자 드퀸시는 바로크라는 용어를 이렇게 정의했다.
바로크, 형용사. 건축에서 바로크라 하면 이상야릇한 것이다. 그것은 이상 야릇함의 세련된 것이라 해도 좋고 또한 그 남용이라 해도 좋다. 현명한 취미의 최상급 형용사가 엄격함이듯이, 바로크란 용어도 이상야릇함의 최상급 형용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로크는 지나칠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지경으로까지 가기도 한다.
참고문헌, 바로크, 임영방 저
물이 범람하는 저지대라는 의미의 플랑드르Vlaanderen 지역은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전역을 뜻했으나 신교도가 많은 북 플랑드르인 네덜란드가 위트레흐트 동맹(1597년)을 결성하고 에스파냐에서 독립한 뒤에 가톨릭 신자가 많은 남 플랑드르인 벨기에로 나뉘게 되었다. 브뤼헤는 저지대인 까닭에 건물들이 고딕적으로 하늘로 수직적이다. 종교개혁의 욕구가 유럽 전역에 퍼질 무렵 이곳 브뤼헤는 반종교개혁 지역으로서 교황청에서는 루터의 신교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서 중요한 곳이었다.
루터에 의해 발견된 것은 가톨릭 신부의 중재 없이 모두가 신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과 대면하고 신의 권능인 죽음에의 면죄부는 가톨릭의 권한이었다. 루터는 모두가 기도를 통해서 신을 만날 수 있다는 신앙 평등주의자였다. 당시 신교와 구교의 공통점이라면 죽음에 대한 사유였다. 죽음의 시각화를 통해서 내면의 종교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성상이나 성유물을 예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라 생각한 루터는 신앙의 사실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루터에 의하면 종교화의 시선은 피렌체의 르네상스적 원근법이 아니라 평면적이어야 했다. 원근법으로 세상을 표현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가까이는 인간이 있으며 저 시선 너머 멀리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화는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며 사람들에게 모진 학대를 인간의 신체와 피로서 성경 안의 사실적이며 평면적 묘사로 그려져야 했다. 그런데 루벤스는 브뤼헤 지역의 화가였다. 브뤼헤는 신교도의 저지선 안쪽에 위치한 문자적인 기준과 기록으로 판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미술을 꽃피우게 한 유화 물감이 브뤼헤 출신 얀 반 에이크에 의해 발명되었다. 일찍이 브뤼헤 지역에서는 유화 물감을 통해서 자연의 사실적인 모방을 해 왔던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는 르네상스 기법의 성스러움으로 가득한 종교화를 거부한 루터에 의해 사실화로 변모해 갔더면 이곳 브뤼헤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부터 사실화의 토대가 있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루벤스는 당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흑인을 시각화했다. 바로크 시대의 스페인 화가 후세페 데 리베라의 안짱다리 소년은 난쟁이를 시각화했다. 계급과 차등적 인간관에서 평등주의적 인간관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크 시대의 종교화가 시각화를 통해 감각에 전달해 내면의 감정을 울려 신앙화했듯이 흑인과 난쟁이를 시각화하고 인간으로서 내면화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이다. 루터가 교황청으로부터 왕과 귀족들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지만 농민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 반대로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 브뤼헤는 사상과 종교, 정치에 있어서 자유로웠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브뤼헤가 오랫동안 한자동맹 지역이었다는 점에 있다.
13세기에서 17세기까지 근 5세기 가까이 브뤼헤는 상인들의 한자 동맹 중심지역이었다. 이곳은 정부와 교황청의 영향력에 자유로웠으며 정치, 종교, 사상보다는 경제적 이익에 따라 삶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유럽 전역의 미술가들이 왕과 귀족, 종교인에 의지해 활동했다면 브뤼헤도 이탈리아 피렌체의 화가들이 상인 가문 메디치에 의존했던 것과 같이 한자 동맹의 길드 상인들의 경제력에 의존해 활동했기에 작품의 주제와 기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교황청, 왕과 귀족들은 상인들의 경제력에 의존해야 했기에 그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을 기념하며 브뤼헤 사람들은 신과 권력의 시간이 아닌 시민의 시간의 공간을 확보했다는 기념으로 마르크트 광장에 시계 종탑을 세우게 된다. 예술 표현의 자유의 극치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유럽 경제의 중심이 신대륙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브뤼헤는 표현의 자유에 의한 바로크적인 기이함이 지속되었다.
아우츠비츠의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향하며 영화가 끝난다고 생각해보면 이것은 열린 결말이라기보다는죽음을 시각화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열린 결말의 장소적 중요성에 주목한다. 역사적으로 자유를 확보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는 곳은 관객들이 더 넓고 다양한 생각으로 결말을 추측할 수 있는 재미를 얻게 된다는 것을 영화 "브뤼헤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이몬드는 어떻게 될까. 전적으로 관객의 자유다. 그래서 영화 "브뤼헤에서"는 볼만한가? 도시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인 브뤼헤가 간직한 중세적 풍경 감상만으로도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