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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꼭그래 Mar 24. 2019

영화 레버넌트

미국인에 관하여


(좌)페테르 파울 루벤스, (우) 추사 김정희


미술이 자연을 재현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정신을 시각화하기도 한다. 중세 서양의 종교화나 한국 선비들의 수묵화가 그렇다. 옛 유럽인과 한국인들이 실현하려 했던 이상적 세계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림을 통해서 정신적 모범을 시각화하려는 목적은 같다. 문자로 제시된 이상사회를 내면화하고 다시 그림을 통해서 시각화해 실현 가능한 세계로 설정하려 했다. 신앙적 기능과 자기 수양이라는 교육적 기능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경전을 통해서 특별한 지위를 얻은 정신이 보다 더 높은 곳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 시각예술인 영화에서도 이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할리우드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와 한국영화 남한산성이 그런 영화들에 속한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을 재현한 공간에서 인간의 평범한 본능을 그려낸다면 특별함을 얻을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015년작"레버넌트, The Revenant"는 인간의 피부 아래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존본능에 예수의 고난과 같은 역경을 경험하게 한다면 그가 고결한 지위를 얻거나 특별한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지를 지각이 아닌 감각으로 전달하려는 영화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봐도 되는 영화다. 다 본 뒤에 할 말이 많아지는 영화이기는 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영화의 서사


한 모피 회사에 고용된 사냥꾼인 휴 글래스는 동료들과 사냥과 가죽 손질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간 곳은 불행하게도 수(sioux)족의 지역이었다. 


실존 인물인 사냥꾼 휴 글래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1971년에 [Man in the Wilderness, 황무지 속의 남자]로영화화 된 적이 있다. 레버넌트가 곰에게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아들마저 동료에게 죽임을 당하자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버린 동료들을 찾아가 복수한다는 이야기라면, 1971년작에서는 자신을 버린 동료를 찾아내지만 복수를 포기하고 기다리는 아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두 영화 모두 실화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복수라는 생존 동기로 이야기의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사는 풍부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래버넌트는 수 만년의 시간 동안 인간이 자연에 써 내려간 수렵채취인 인디언과 농업인 유럽인에 관한 역사적 만남과 대립이라는 영화 외적인 서사를 배경으로 삼았다. 감독은 미국의 장엄한 풍경으로 생각의 쉼터를 마련해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종교, 자연, 역사, 윤리에 관한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방식은 앞서 설명한 종교화와 수묵화와는 반대의 과정이다. 재현된 자연 속에서 인간의 본능을 시각화하고 관객의 내면을 거쳐 문자화 하게 하는 방식이다. 



타데오 디 바르톨로의 제단화 중에서 다대오 성인

영화 포스터를 보면 불꽃이 핏줄처럼 허공에 날리고 주인공 휴 글래스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시선은 자연화되어 관객을 향한다. 여전히 고전미술의 표현방법이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음을 확인하는 정도일 수도 있겠지만, 감독이나 포스터 디자이너가 몬테풀치아노 대성당의 타데오 디 바르톨로의 프레스코화에서 영감을 받은 느낌이다.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에서 다른 등장인물들과 시선이 다르거나 이름이 작가와 언어유희적으로 비슷한 특정 인물을 작가의 자화상이라 해석하기도 하는데, 타데오 디 바르톨로의 몬테풀치아노 대성당의 제단화에서도 다대오 성인이 타데오의 자화상이라는 해석이다.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배신자 가롯의 유다가 아닌 야고보 아들 유다인 다대오를 자신의 얼굴로 그렸고, 마지막 만찬에서 유다가 예수에게 한 말 "어찌하여 우리에게는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세상에는 보이시지 않으십니까?"라는 말에서 착안한 듯 대대오 성인은 이상적인 세계인 몬테풀치아노의 풍경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제단화의 다대오 성인의 모습과 같이 영화 포스터도 감독의 자화상이면서 자연의 시선으로 한 인간을 제시하고 있다. 


루벤스의 그림과 김정희의 그림이 사유의 세계를 현실의 현상으로 제시하고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면, 영화 레버넌트는 그와는 반대로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관객들의 사유 세계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발견하고 재인식할 기회를 주고 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관객은 종교와 이념이 인류에게 제시했던 도덕적 모범을 추려내게 될 것이고 옳음에 관해서 무엇 무엇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생각의 시작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아득히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오래전 이야기로


영화는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에서 인간의 본능을 다루고 있다. 겨울을 통해서 인간의 본능과 탐욕, 광기를 다뤘던 영화로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나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가 있다. 레버넌트가 그 영화들과 다른 점이라면 영화 외적인 서사가 최소한 만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점이다. 서사의 리부트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종교, 철학에 관한 인식의 리부트가 가능한 시기, 빙하기였던 만년 전 인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사피엔스) 수렵채취로 생존했던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이 번창하는 만큼 지구 상의 동물들은 멸종했다고 한다. 인간을 피해 얼음 세계인 북쪽으로 이동했던 매머드가 시베리아 어느 벌판에서 멸종한 것은 인간의 포식성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이 진실에 가까울지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그렇게 잔인한 동물이었던가? 지구 전역에 진출한 인간에 의해서 동물들이 완전히 멸종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후손인 수렵채집인들은 잔혹성을 잃었는가? 


 인간이 피식의 대상인 동물을 잡아먹거나 포식의 경쟁자인 맹수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구의 동식물들도 그로 인해 번창했으니 말이다. 그것만 가지고는 동물들의 멸종을 인간의 포악성과 연결해 설명할 수 없다. 수렵 채집인들이었던 호모 사피엔스에게 먹이가 되는 것은 동물의 살점만이 아니라 식물의 열매나 뿌리였다. 그렇기에 동물을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조금 더 채집 시간을 늘려 먹이를 구하면 됐다. 보다 더 많은 동물의 살점을 얻기 위해 채집 시간을 줄이고 수렵 시간을 늘리게 한 다른 요인이 발생한 것이다. 먹이가 되는 살점만이 아니라 신체를 보호할 동물의 가죽도 필요하게 했던 추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멸종은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인 셈이다. 


페테르 브뤼겔, 눈 속의 사냥꾼

지구의 급격한 환경변화에 의해 대부분의 생물들이 자취를 감췄다. 보온을 위한 털이 없는 추위에 약한 피부를 가진 인간도 빙하기에 도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류는 빙하기에 다른 동물들보다 번창했다. 그들의 신체적인 단점을 극복하는 방법, 다른 동물들의 가죽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켜줄 수 있다는 이유로 수렵채집인에게 동물의 가죽은 화폐와 같았다. 부족한 식량을 얻기 위해 남는 가죽을 다른 부족의 식량과 교환하기도 했다. 어쩌면 최초의 잉여생산물의 교환은 동물의 가죽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시골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 겨울이면 토끼의 가죽을 벗겨 팔기도 했다)


BC 4500년경 농업혁명을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 모직물과 면직물의 제작이 널리 알려졌기는 하지만 가죽의 방한 기능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다. 인간이 태생부터 포식자의 잔혹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추위라는 환경이 생존 본능을 강화하게 했던 것이다.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죽은 더 많이 필요했다. 문자가 만들어지자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해 새롭게 정의 내리기 시작했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천지불인天地不仁, 노자는 자연이 인간과 성격이 다르다고 말한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시작을 선언한 것이다. 여전히 자연 중심적 세계관이었던 시대적 흐름에서 인간에 관한 성찰을 노자는 자연의 예를 들어 설명했을 뿐이다. 제왕학이라 할 수 있는 노자의 도덕경은 통치자에게 인간의 성격을 알게 하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자연현상과 같은 법이나 통치시스템을 토대로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국가운영을 말하고 있다. 노자는 자연으로 떠나라고 말하는 낭만주의자나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자연의 성질을 인간사회에 적용시키려던 현실주의자였다. 


유가의 내용을 보면, 중용의 첫 구절에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이 도라고 한다. 도가처럼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인간이 자연에 예속된 것으로 생각했다. 자연과 인간의 분리에 다분히 미온적인 이 사상은 당대에는 주목받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자연과 짝으로 관계되고 특별한 지위를 얻는 사람을 왕이라는 통치자를 설정하기는 했지만 당대에 필요한 사상은 아니었다. 도가의 사상을 바탕으로 법가를 수용한 이념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이런 의식적 흐름 속에서 출현한 것이다. 


자연과의 짝의 개념에서 나를 파악했던 수렵채취인들이 농업인으로 변화하면서 사회 내 인간관계에서 자신을 파악하려 했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고 하늘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에는 새로운 사회 작동원리가 숨어있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기후의 주재자인 하늘은 인간을 예속시키며 지위가 상승한다. 하늘과 연결된 황제의 지위는 인간사회에서 절대적이 된다. 황제를 따르는 인간은 하늘 아래 자연계의 것들보다 지위가 상승하여 자연계의 것들보다 특별한 존재가 된다. 특별한 의식이나 이념 혹은 관습적 윤리관에서 제한되었던 자연관은 폐기되고 언제든 자연을 이용하거나 파괴할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인간은 집을 짓기 위해 언제든 정령이 깃든 나무를 벨 수 있으며 농업을 위해서는 신의 몸뚱이라 생각했던 땅을 파헤칠 수 있게 됐다. 황제의 은총에 의해서. 


이 시기 중국의 고전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을 혈연적 인과 관계 안에서 짝의 개념으로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당시 이 의식의 흐름을 알게 하는 것이 이름이다. 농업사회 초기에 중국인들은 이름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명체불리命體不離라는 의식이 있었다. 옛 중국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 죽음의 사자가 그를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당대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 사기에 수많은 인물들의 본명을 기록했지만 자신의 아버지 사마담의 본명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도 명체불리라는 의식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임안이라는 친구에게 보낸 보임소경서라는 편지에는 사기를 집필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천인지제究天人之際, 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관통해서 기존에 없던 시각으로 세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농업혁명 이후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기록했던 것이다. 


 중국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금도 한 개인을 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한다. 자연과의 짝으로 인간을 파악하던 것에서 공동체 내에서 인간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인간이 자신을 파악하던 방식은 자연과 인간의 짝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 했던 것을, 지금은 애니미즘이라 한다. 영화 레버넌트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을 파악하려는 농업인들과 자연에서 자신을 파악하려는 수렵채집인의 의식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미국 인디언에 관한 몇 가지 오해


앨버트 비더슈타트, 수족 sioux 인디언 마을

수렵채취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돌화살촉으로 판단하자면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적어도 BC 900년경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농업인의 후손인 콜럼버스가 1492년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만년 동안 인디언들은 수렵채취의 방식으로 살아왔다. 미대륙을 떠나 남미로 향한 인디언들은 BC 4500년경 전 지구적인 농업혁명에 동참했다. 농업사회는 분업의 발생을 초래했다. 분업에 의해 자신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생산하고 거래되는 촌락과 도시가 발달하고 국가가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도시나 국가가 없던 미국의 인디언들을 미개 사회 혹은 원시사회라 칭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농업인들의 후손인 우리의 평가에 불과하다. 


그들에 관한 가장 커다란 오해는 이유 없이 백인들을 공격하고 살육과 약탈을 벌이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수렵채취인 들이다.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침입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에 저항한 것뿐이다. 학문적으로 주거지에 관한 가장 그럴듯한 정의는 농업혁명 이후의 정착생활에 기반한 것이다. 수렵채취인들의 주거지는 농업인들처럼 숙식을 해결하는 가옥의 형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이루어지는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이런 오해는 인디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호랑이를 예로 들자면 그들의 집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수십 킬로에 달하는 영역 전체가 호랑이의 집인 셈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호랑이가 굴에 은신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은연중에 정의해버린 것이다. 굴이 없다면 호랑이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굴은 새끼를 낳기 위한 부차적인 공간이다. 굴이 없다고 해서 새끼를 낳지 않는 것도 아니다. 


농업인들이 땅과 집과 공동체에 종속된 삶을 살아왔다면 인디언들은 자연과 상호적인 관계였다. 자연이 그들에게 적은 음식물을 제공한다고 해서 농업인들처럼 더 많은 생산량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자연이 주는 양에서 식단이 조절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누군가 침입해 그들의 양식에 손을 댄다는 것은 그들의 생존에 커다란 위협이다. 


다른 오해는 인디언들의 사회 시스템이 원시적인 독재 통치라 생각하는 것이다. 농업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기원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 출발점에서 발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디언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갑자기 창조해낸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어떤 체계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디언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인디언 부족들은 오래전부터 집단의 미래를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통해서 정했다. 그들의 의사결정 방식은 그리스와 로마보다 현대적이다. 성별, 계급,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권한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의사결정 권한이 있었다. 추장이라는 사람이 집단의 리더이면서 모든 사안에 관해서 독자적 의사결정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단지 주요 안건을 회의에 제안하고 경험에 따른 조언을 해주는 역할일 뿐이었다. 농업인들의 후손들인 우리는 만년 전 수렵채취인들의 의사결정방식을 이제야 흉내 내거나 잊고 있었던 의사결정방식을 복원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민주적인 절차를 제도화하게 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한 장면,

농업혁명 이후 농경지 인근에 정착촌이 생기고 인구수가 증가하면서 도시와 국가 그리고 종교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터키 괴베클리 테베 유적지는 농업혁명 이전에 세워진 종교적인 건축물이었다. 괴베클리 테베에서 30여 킬로 떨어진 곳은 인류가 최초로 밀을 재배종으로 삼으려 했던 흔적이 발견된 카라사다다. 터키 괴베클레 테베와 카라사다의 유적과 흔적을 통해 유발 하라리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는데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서 농업이 발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인디언들 대부분이 자연주의적 신앙이라는 공통된 의식이 있었고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며 문화적으로 크게 이질적이지 않았던 미국 인디언들이 수렵채취에서 농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의문이다. 몇 유적의 발굴을 통해서 보자면 인디언들이 옥수수 재배를 하며 정착생활을 했던 거대 촌락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대적인 보편종교의 출현이나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은 인디언들의 세계관과 관련 있다. 그들은 철저한 평등주의자들이었고 사후세계와 현실세계를 완전히 분리했다. 자연에 인간이 종속된 것이라거나, 신체와 영혼이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편입되거나, 그들의 피식자들이 자신들의 먹이 사슬에 예속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 인간, 자연, 동식물 모두 우주질서 속에서 생성과 소멸하는 평등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을 찬양한다거나 죽은 자와 산 자의 연결 장소이자 망자를 기리는 고정적인 종교적 장소가 필요 없었다. 종교적 장소는 삶의 흐름인 이동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그들이 떠나면 없어졌다. 평등주의는 소유의 개념이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 잡을 수 없게 했으며 생명주의적 종교관은 살아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었기에 사후세계의 절대자인 신을 찬양하기 위한 제단이 필요 없었던 의식 환경이었다. 영화는 오랫동안 서로 다른 삶과 의식 환경에서 살아온 미국 인디언들과 농업혁명 이후 6천 년간 다른 의식으로 전환된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난다는 설정이다. 


약탈자

프레드릭 레밍턴, 승리의 춤

휴 글래스와 모피회사가 사냥터로 정한 곳은 불행하게도 수족의 영역이었다. 수족은 평야지대에서 수렵과 약탈을 통해 살아갔다. 사유재산과 계급이 존재했으며 족장이 부족을 이끌었다.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폭력적인 인디언들은 주로 이들이다. 유럽인 약탈자와 인디언 약탈자가 만나게 된 셈이다.


농업사회로 전환되었다 하더라도 약탈은 국가의 가장 효율적인 경제정책이었다. 오히려 수렵채취 시절보다 더 약탈이 쉬워졌다. 정착지라는 고정된 목표가 생겼으며, 식량의 수확기가 명확하기 때문에 언제 약탈할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약탈은 부를 축적할 시간과 노력을 단축해주고 막대한 돈과 재물, 식량을 순식간에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약탈이 가능한 군사력과 이동 경로와 수단이 확보되면 약탈경제 국가는 국경 너머로 향한다. 수많은 국경을 지우며 제국을 건설하게 하는 약탈경제는 팽창이 끝나는 시점에서 몰락하게 된다는 한계성을 갖지만 약탈은 약탈경제가 가능한 여건이 된다면 대부분의 국가가 꿈꾸는 엘도라도였다. 


약탈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는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약탈에 참여할 자가 있어야 하며, 약탈을 당한 집단에게 보복을 당할 위험이 있었으며, 돌아오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재 약탈을 당할 위험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약탈지를 정착지로 삼아 농경사회로 전환하기도 했다. 때로는 국가적 단위의 대규모의 정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백촌강(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 패하며 백제는 멸망한다. 백제인들은 바다 건너 일본으로 망명해 새로운 삶을 찾아야 했다. 일본 왕은 백제인들이 정착하게 될 땅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했다. 그들이 개척해야 할 땅에는 원주민인 수렵채취인 들인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농경이 이루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농업인 백제인들의 정착생활 때문에 생태계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목격하게 되고부터다. 


 쌀을 제외한 다른 식물들의 종자를 없애기 위해서 다른 풀들은 태워야 했다. 겨울의 마른풀을 먹어야 했던 초식동물들은 황폐해진 그곳을 떠나야 했다. 백제인들은 아이누족들에게는 식량의 감소를 가져다주었던 셈이다. 여름에는 사냥하던 벌판은 농지가 되면서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이 되어 동물을 뒤쫓아 사냥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결국 그들의 삶이 파괴되어갔던 것이다. 아이누인들의 불만은 폭발하여 백제인의 정착을 지원하는 일본 왕에게 그 화살을 돌려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일본 왕은 백제계 무장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 에게 그들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에미시라 불리는 수렵채취인 들을 크게 격퇴한 다무라마로는 일본왕의 총애를 받으며 백제인들의 정착을 돕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원령공주"의 배경이 되었던 것은 백제인들과 에미시라 불리는 아이누족들의 대립이었다. 도래인(백제, 가야. 고구려인들)과 에미시의 싸움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신사가 일본 전역에 지이졌으며 그 시대를 귀신의 시대라 하기도 하고, 도래인인 농업인들의 정착으로 국가의 재정은 증가하고 정치의 중앙집권화와 왕조의 통치가 안정화가 되었다해서 헤이안(平安)시대라 한다.


미대륙에서도 유럽인들과 인디언들의 대립은 마찬가지였다. 아이누족들이 변방으로 쫓겨난 것처럼 인디언들이 특정한 구역으로 내몰리면서, 주인 없는 땅에는 망명에 의해서 건 자발적이었건, 백제인들의 일본 정착과 마찬가지로 미국 대륙에서도 정착자들이 증가하면서 인디언들과의 삶과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명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영화 포스터

신대륙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에게 가장 최상의 약탈 대상에서 최적의 정착지가 된다. 영화 레버넌트에서 약탈에 참여한 휴 글래스가 약탈지에 정착하는 것처럼 미 대륙은 정착민들이 점점 증가하게 된다. 약탈자보다 정착자가 많아지면서 정착지를 지키기 위해 약탈자들과 싸워 승리하면서 미국이 탄생한다. 



허드슨리버파


앨버트 비어슈타트, 록키산맥

미국의 허드슨리버파가 유럽의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았기는 하지만 미국의 장엄한 풍경 묘사는 종교화와 같은 신성함이 담겨있다. 오래전 미국 인디언들이 자연과 인간을 짝의 관계로 자신을 파악했던 것처럼 미국에 정착한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메리카 대륙이 종교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자연의 재현일 뿐이지만, 화가가 자연에서 포착한 어떤 풍경 자체가 인간의 정신을 고상하게 함양시키거나 고결함으로 고취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The Revenant

이제 영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휴 글래스는 우여곡절 끝에 캠프로 돌아오게 된다. 아들을 죽인 존은 휴 글래스를 피할 목적이면서 합법적인 살인을 할 수 있는 군대에 들어가려 캠프를 떠난다. 휴 글래스는 존을 추격하고 찾아낸다. 재미만 점은 백인들이 경악했던 인디언들의 전술을 통해서 존(톰 하디)을 상처 입히는 장면이다. 백인들이 경악했던 전술은 다름 아닌 총알을 맞아도 죽지 않는 인디언들에 관한 이야기다. 당연히 죽었으니 다시 죽을 수 없는 시체를 나무로 고정시키고 말에 태워 백인들에게 달려가게 한다. 자신들의 동료였던 시신을 방패막이로 삼아 백인을 공격했다. 백인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총을 의심했으며 나중에는 인디언들은 죽지 않는 죽음의 전사들이라 생각했다. 미국 백인들에게는 자신의 동료를 그렇게 이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듯하다.


(앞서 말했듯 인디언들은 현실과 사후세계를 분리했다).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모피회사의 고용주인 앤드루 헨리의 시신을 인디언들처럼 이용해 존을 격투 끝에 사로잡는다. 이제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버린 복수를 완성할 수 있을 때 "복수는 신의 뜻대로"라는 인디언 격언을 떠올리며 그를 강물에 빠트리고 수족의 손에 존의 생사를(복수를) 맡긴다. 영화는 숲으로 돌아가는 인디언 아내의 영혼을 휴 글래스가 배웅하며 끝난다. 그들은 완전한 이별을 이룬 것이다.


우리는 간혹 종교와 이념을 통해서 모범적인 인간 상을 양식화하면 이상 세계로 나아가는 인간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세계대전으로 완전한 착각임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그것에 희망을 품고 있다.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지 않았던 시절에 오히려 인간사회는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야만의 시대라 하는 석기시대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 폭력에 의한 사망이 현대인들보다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를 인문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유럽인들과 달리 미국의 인문주의의 차이점은 미국인들에게 인디언들의 자연주의가 영향을 주었으며, 역사 이전의 원시시대나 야만의 시대로 폄하되는, 자연과 짝의 관계로 자신들을 설명하려 했던 수렵채취인들의 삶과 정신이 미국이라는 삶의 터전에 적합했던 삶의 동기라고 감독은 생각하는 듯하다. 사마천과 마찬가지로 이냐리투 감독은 미국의 대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관통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미국인들에 관한 영화적 기록물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영화 레버넌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의 정신이 아주 특별하다고 믿었던 이후로 인류를 특별하게 해 준 것은 야만의 정의였고 폭력이었다는 것을 인류의 자화상과도 같은 휴 글래스(디카프리오의)의 마지막 얼굴 표정에 담긴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Ps –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관해서, 특히나 영화적 서사에 익숙하게 되면, 상상이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휴 글래스의 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레버넌트에서 말을 타고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장면과 비슷하게 차에 치여 홀로 설산에 고립된 적이 있다. 자신을 죽이려던 동료를 찾아내 복수를 하는 것이 영화적 서사라면 실제에서는 생존만이 유일한 관심사다. 실화의 이야기가 극적이지 않아 다소 맥이 빠지겠지만, 살아 있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된다.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관객에 대한 배려 차원이거나 영화적 서사의 완결을 위해 극적인 사건을 하나 더 넣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수라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생존이라는 1차적인 문제에서 복수라는 것까지 생각할 수 없다. 생각보다는 감각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기에 실화가 더 적절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도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상황에서 복수를 생각한다고? 


가상세계에 산다는 것은 현실과 가상의 일을 냉철하게 구분하지 못할 때의 일이다. 영화적 서사를 현실과 혼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이유로 다루지 않으려던 영화였다. 


참고문헌, 호모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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