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가치. The value of art
예술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정신적 가치와 관련된 것들이다. 상업적 가치에 관해서는 그리 많이 다뤄지지 않고 있다. 상업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보다 덜 중요하거나 탐욕에 관해서 말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행위라서가 아니다. 어떻게 말해져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의 상업적 가치에 관해서 부정적이었던 독일의 라울 하우스만(1886 - 1971년)과 같은 다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예술의 목적이 상업적 가치만을 추구해서도 안 되겠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의 미술은 상업적 가치를 잃어서도 안 된다. 종종 미술시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 또한 컬렉터나 일반 대중들이 작품의 예술성과 가격에 관해서 오해를 할 염려 때문인지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미술시장에 관해서 영화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하지만 주식시장을 보여주는 할리우드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미술시장과 관련된 사람들의 속물적인 모습뿐이다. 주식시장에 관한 영화들과 비교하자면 그렇지만 미술시장에 관한 영화끼리 비교하자면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 차이에 관한 이야기다. 미술시장을 다룬 영국 영화 부기 우기 Boogie Woogie와 벨벳 버즈소 Velvet Buzzsaw라는 할리우드 영화 그리고 201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더 스퀘어 The Square라는 스웨덴 영화 한 편을 통해서 어떻게 미술시장을 보여주고 있는지 보고자 한다. 구매력 평가라 할 수 있는 평점으로 따지자면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 영화들이지만 미술시장을 다룬 몇 안 되는 작품들이고 영화의 주제를 그림이라는 시각 언어로 제시한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미술시장과 관련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은 외젠 들라크루아와 재클린 로크에 대한 헌사였다.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을 바탕으로 A부터 O까지 연작으로 그려진 알제의 여인들 마지막 작품 버전 "O"에는 피카소의 나이 72세에 결혼한 아내이자 마지막 모델이었던 재클린(당시 27세)을 뮤즈의 왕좌에 앉혔다. 2015년 5월 11일, 경매가 시작된 지 11분 30초가 지나자 크리스티 경매사 유시 필카넨은 알제의 여인들(버전 O)의 새로운 주인을 선언한다. 전화 응찰자에게 179,365,000달러 한화 약 202,682,000(이천 이십육억 팔천 이백 만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낙찰된 것이다. 이 놀라운 가격과 그 돈을 내겠다는 전화기 너머의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엄청난 자산가이자 예술 애호가 혹은 투자가일 것은 분명하다.
"사랑하다 amare"라는 라틴어를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예술 애호가"아마퇴르amateurs"]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어떤 것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자들을 일컫는 아마퇴르는 영어에서는 비전문가라는 아마추어 amteuar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예술 애호가(아마추어)와 예술 전문가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퇴르들이 어떤 유형의 그룹을 형성하고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자 그들을 전문가라 칭하게 됐다. 그러니까 전문가 그룹은 특정 분야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한 아마추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분야에 심취한 사람을 칭하는 "오타쿠"라는 일본어를 한국에서 "덕후"라는 말로 변행해 사용하듯이. 아마추어들은 작가이기도 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 마음에 들면 수집하기도 했기에 컬렉터이기도 했다. 혹은 컬렉터들을 위해 작가와 그림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해주는 미술사가와 미술비평가가 되기도 했다. 예술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진 않지만 미술비평가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는 작품들을 투자가들에게 추천하고 수수료를 얻는 경매소와 갤러리에 고용된 아트딜러들도 등장하게 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대중들이 이용하는 화폐는 동전과 지폐지만 자본가의 화폐는 예술작품이라 말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자본가들은 예술품을 경쟁적으로 수집하게 됐을까. 프랑스 최초의 미술비평가인 드니 디드로가 종교적 도덕주의라는 전통적인 정신적 가치와 싸우면서 의도하지 않게 부각된 것은 자본가들의 상업적 가치였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인 연옥이 각광받았으며 정신적 가치를 지닌 예술품을 통해서 영혼의 정화를 시도했다는 위안을 삼으려 했던 것이다. 예술은 일종의 자본가들의 탐욕에 관한 면죄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면죄부의 성격은 사라졌지만 영혼의 정화기능은 지속되고 있다. 미술관이 세워지던 17세기 이후 예술품의 새로운 소비층으로 대두된 시민계층의 예술 애호가의 등장은 예술이 정신적 가치에서 상업적 가치로 전환된 계기였으며 그들을 위한 경쟁적인 미술시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년 가까이 소장자를 설득한 끝에 2013년 7월 11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 번존스의 "폐허 속의 사랑"이 경매에 올랐다. 최후에 두 명의 경쟁자가 남았다. 당연하게도 경매에는 늘 두 명의 경쟁자가 남게 되는데, 경매사가 유도해낸 일이다.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포기한 사람들은 두 경쟁자의 결단을 지켜보면서 환호성을 지른다. 작품 구매의 동기가 사랑인지 탐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낙찰이라는 승리를 쟁취한 자가 누구일지에 관해서만 관심 갈 뿐이다. 한화로 대략 이백 오십억 원(25,372,000억 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에 익명의 응찰자에게 낙찰됐다. 이 엄청난 금액 앞에 우리는 소장자의 그림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소장자의 그림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구매하려는 경쟁자들의 환상과 경쟁심, 소유욕에서 비롯된다.
다빈치나 보티첼리, 티치아노와 같은 대가들의 그림들이 거래되는 곳이 미술시장이라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가들의 작품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소유하고 있어서 그런 작품들은 거의 거래되지 않는다. 아트프라이스 artprice에 의하면 전 세계 경매 미술장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미술품의 48%를 차지하는 것은 동시대 미술이나 현대미술이다. 세계 대전 이후의 작품들까지 더하면 20세기의 작품들이 대략 80% 가까이 거래되고 있다. 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옛 대가들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 작품은 20% 안 쪽에서 거래되고 있다. 2017년 한 해, 세계 경매 미술시장의 총거래량은 대략 16조 원이었다. 동시대 미술과 현대미술이 거의 8조 원가량 거래된 셈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서도, 그리고 최근의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에도 불구하고 미술시장은 그리 영향받지 않고 있다. 오히려 중국의 미술시장은 미국을 추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8년 세계 미술시장에서 각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미국이 38%로 세계 대전 이후로 줄곧 선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고 경제 강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29%로 미술 경매의 종주국인 영국(18%)을 제치고 확고하게 2위 시장을 형성하는 추세다. 프랑스(4%), 독일(1.7%), 이탈리아(1.3%)가 뒤를 잇고 있다. 동시대 미술이나 현대미술이 각광받고 있다는 것은 1차 미술시장의 규모가 커져왔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 귀족이 한스 홀바인의 작업실을 보기 위해 찾아갔지만 거절당한다. 자신의 신분 정도면 허락을 구할 것도 없이 당연히 들어가도 되는 것 마냥 작업실로 들어가려 하자 한스 홀바인은 귀족을 계단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귀족은 화를 참을 수 없어 헨리 8세를 찾아가 한스 홀바인을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헨리 왕은 단호히 거절한다. 일곱 명의 소작농을 일곱 명의 귀족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한스 홀바인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며 그 귀족에게 도리어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술 애호가로 보이는 귀족은 따지고 보면 동시대 미술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와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은 예술 감상의 한 부분이었다.
자신의 작업실을 공개하기를 꺼렸던 한스 홀바인은 예외적인 인물이다. 피카소와 잭슨 폴락은 방문자들을 언제나 환영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몇몇 작가들은 사람들의 방문이 뜸해지면 인기가 시들어졌는지에 관해 가까운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고 전해진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 방문자가 되기도 한다. 호크니의 풍경화 작업이 궁금한 사람들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난 뒤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떠나간다. 예술은 한 시대의 일부분이다. 시대의 일부분과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구매할 수 있다면, 최초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은,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아직 누구도 소유한 적 없는 "소유 이력"이 없는 그림이 거래되는 곳이 1차 미술시장이다. 작가의 작업실일 수도 있고 어느 거리의 벼룩시장일 수도 있으며 인터넷 어느 사이트 일 수도 있고, 갤러리일 수도 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사에서 거래되는 "소유 이력"이 있는 작품들을 거래하는 곳이 2차 미술시장이다. 아트바젤(마이애미 비치, 홍콩), 과 아트페어와 같은 곳은 1차 시장이면서 2차 시장이기도 하다.
작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대략적으로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작품의 크기와 완성되기까지의 시간, 재료와 같은 물리적인 요인과 작가의 브랜드적 가치, 시대와 교감하는 정신성, 시각적 즐거움이라는 정신적인 요인들이다. 작품의 크기가 너무 크다면 재료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 책정될 가능성이 높다. 학교나 공공건물과 같은 곳의 커다란 그림이 그렇다. 대개 거대 전시 공간이 필요한 작품들은 낮은 가격에 팔린다. 그렇다고 작은 그림이 높은 가격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데이비드 호크니와 같은 잘 알려진 작가에게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미술 역사상 가장 큰 풍경화인 데비드 호크니의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처럼. 혹은 작은 그림이라도 이중섭의 작품처럼 높은 가격을 받을 수도 있다.
어디에 그려졌느냐도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종이에 그려진 것보다 내구성이 뛰어난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 더 높은 가격을 보장한다. 색을 통해서도 가격이 달라진다. 흑연이나 목탄과 같은 단색화보다 다양한 색을 사용한 그림이 더 높은 가격에 팔린다. 시대의 정신성을 담았다고 해서 더 높은 가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구매자가 그 정신성을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구매자는 제한적일 수 있다. 대개 인지도가 낮은 작가들의 그림은 시간, 재료, 크기, 색상에 따른 제작기간이라는 노동시간과 원재료비와 같은 공산품과 같은 적용을 받는다. 인지도가 낮은 작가가 아무리 높은 정신성을 담았다 하더라도 진정성을 확인시켜줄 작가의 삶이 어떤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술시장이라는 곳의 대략적인 윤곽을 이야기했다면 이제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로 들어가 보려 한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될 영화는 벨벳 버즈소다. 이 영화에는 흥미로운 배우들이 출연한다. 영화 유전에서 심리적인 충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토니 콜레트, 캐릭터의 성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제이크 질렌할과 별 내용 없는 대사라도 의미로 가득 채우는 울림을 넣어 주는 연기파 배우 존 말코비치, 영화가 어떤 결말로 끝날지라도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은 여운을 남기는 르네 루소라는 배우들이 출연한다.
영화 벨벳 버즈소는 독일 표현주의풍의 그림을 중심으로 다다이즘적 비극으로 결말을 이끌어낸다. "No died, No art", 죽음이 없었다면 예술도 없다는 갤러리 관장 로도라 헤이즈의 몸에 새겨진 문구를 실현시키려는 듯 관련 인물들은 예술 작품들에 의해 죽거나 미술시장을 떠난다. 장작자인 작가 피어스(존 말코비치)만이 남는다. 세계 경매시장의 40%를 차지하는 미국적 상황에서는 공포영화로 다가갈 수 있겠지만 한국과 같은 예술 불모지의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해서는 의문이다. 어쨌거나 이런 형식을 통해서 미술시장 관계자들의 속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흔히 독일 표현주의 그림을 보면 아이들도 그릴 정도의 그림이라 말해지기도 하는데, 아이들은 키르히너의 "거리의 두 여인"처럼 그릴 수 없다.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은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고 심리 상태를 과감한 색채로 강렬하게 표현하려 했다. 이렇게 그려내려면 기존의 방식들을 모두 알아야 하기에 아이들은 절대 이렇게 그릴 수 없는 것이다. 여인들은 아무 관심 없는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처럼 무표정하다.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심리 상태도 알 수 없다. 그녀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옷차림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서 얻으려 하는 무언가가 옷차림에서 드러난다. 그녀들을 맞이할 누군가의 환대와 정중한 대우다. 두 여인이 자신들의 옷에 성격을 부여한 것처럼 키르히너도 옷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영화에서 인격을 부여받는 것은 그림이다. 영화에서 베트릴 디즈라는 노인이 남긴 그림들을 미술비평가로 등장하는 제이크 질렌할이 평하기를 많은 기법들이 이용되었다고 하지만 기법들을 배제한 그림들이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파인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다다이즘에 영향을 준 독일 표현주의 그림을 등장시킨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독일 표현주의 풍의 그림들은 미국에서는 그리 인기를 얻을만한 작품들은 아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벨벳 버즈소라는 톱날을 몸에 새겨 넣은 갤러리 관장 로도라 헤이즈의 죽음을 통해서 미술관계자들의 돈에 관한 허영과 욕망을 간접적으로 연상되게 하는 것은 라울 하우스만의 포스터다. 예술이 돈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거래될 수 있는 상업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 주장했던 독일 미술가이자 언론이었던 조지 그로스라는 사람을 조롱하고 있다. 목덜미에 꽂힌 독일 화폐에 의해 그가 돈에 좌우되는 사람임을 비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영화 말하는 것과 같이 이 영화의 볼거리는 상업적이어야 하는 내적 재미보다는 등장하는 배우들 자체와 영화와는 상관없이 전시된 다른 그림 들이다. 그것이 처음부터 영화의 의도라면, 매우 성공적이다.
상업적 성공을 한 예술가에게는 비평을 면할 특권이 주어진다. 아트 딜러의 눈과 마음에 띄어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가 부족하더라도 상업적 가치의 가능성이 보인다면 작품은 비평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몰이해에 관한 사회비평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한다. 영화 부기 우기에서는 사회적 가치를 가진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과 상업적 가치를 가진 포르노 영상이 미술시장에서 동시에 각광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을 보여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하위문화였던 부기 우기라는 춤이 주류문화에 흡수되어 문화적 균형을 이루어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담은 몬드리안의 부기 우기라는 작품처럼 포르노라는 하위문화가 상업적 가치를 통해서 주류문화에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백 억원이 넘는 엄청난 가격을 제시하지만 작품을 내주지 않는 예술 애호가와 기어이 경매시장에 끌어들이려는 아트 딜러,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작가와 작가를 통해서 성공하려는 갤러리를 통해서 미술시장이 사랑과 욕망이 함께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좋은 배우들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가와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DVD로 보기를 권하고 싶다. 영화에서 전시된 작품들의 주제는 부기 우기와 마찬가지로 하위문화와 주류문화의 융합과 균형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가진 작품들이다. 혹은 그 허상을.
The square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다소 무거워 보일 수 있는 공론장이라는 주제를 가벼운 일상을 통해서 사회적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상호 작용으로 공간의 성질이 결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제목만으로 예상할 수 있는 주제였고 내용이 무척 버거워 보였지만 북유럽 영화들의 특징처럼 무거운 주제를 캐주얼하게 보여주는 능숙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국의 헌법 전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살아가야 할 국가라는 공간이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 성인이 된 내가 나에게 처음으로 선물한 것이 헌법이었다. 헌법 전문을 읽으며 누군가는 가슴 벅찬 감동을 받기도 하고 아무런 느낌도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헌법 전문을 처음 읽고 나타냈던 반응은 "종교네!"라며 웃었던 것 같다. 사회규범이나 종교적 가르침들을 삶에서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고는 해도 그것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거나 심각하게 균형이 무너진다면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것과 같은 사회 관습과 도덕 혹은 종교의 다른 버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사회라는 물리적이며 심리적인 공간은 개인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변형될 수 있지만 사회적 합의나 어떤 정의에 따라 원형을 복구하려는 힘을 갖게 된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불행이었고 후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 힘을 확인한 경험들이 한국인들은 많다. 영화를 통해서 비치는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가치체계임에도 불안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잠재적 힘을 영화를 통해서 확인하려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한 위로와 촛불집회와 같이 현실에서 확인했다는 차이 때문인지 그 불안감이 보였을 수도 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철학적 가치체계에 충직한 이성인가. 사회 관습적인 양심에서 비롯되는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개인적인 욕망이거나, 혹은 언어로 정의되지 않는 끊임없이 변형되는 자유로운 영혼의 이끌림인가. 우리는 안다. 같은 질문에 늘 다르게 대답할 수 있다고.
이렇게 세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소개한 이유는 따로 본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각각의 영화들이 지닌 장점과 단점이 분명해지고 다른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 편을 순서와 상관없이 연달아 보기를 권한다. 물론 영화들이 미술시장을 완전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희소한 소재인 미술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관한 영화 각자의 상상력과 미묘하게 다른 생각의 문법을 접할 수 있어서다.
참고문헌
예술을 보는 눈, The value of art, 마이클 핀들리. 이유정 옮김.
Going once, 크리스티, 이호숙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