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by 선유

나의 주말은 000 북카페에서 시작되곤 했었다. 나는 3년째 이곳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에 참석해 왔다. 우연히 어느 북카페 소개 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모임을 시작한다는 공고를 보고 처음 발걸음 하게 됐다. 북카페는 신촌 뒷골목의 경의선 철길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하얀 벽과 통창 그리고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 벽돌 책부터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고전소설과 한국소설 등 다양한 종류와 작가들의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그리고 하루키가 젊은 시절 운영하던 째즈바의 이름을 딴 곳답게 하루키의 책들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책장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 것 같다.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지적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이다. 그래서 책도 많이 사고 많이 읽고 싶었지만, 언제부턴가 책 한 권을 읽어 내는 게 너무 힘겨웠다. 아마 20대 동안 완독한 책을 다 합쳐도 손가락 발가락 수보다 적을 것이다. 그래도 책은 "읽어야 하는 것"으로 항상 마음에는 부채감이 있었고 해결해야 하는 숙제처럼 압박감도 느꼈다. 혼자 힘으로는 번번이 실패했기에 독서모임의 힘을 빌려 그런 부담을 해소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하루키의 장편 소설을 연대기 순으로 한권씩 읽고 북카페의 모임에 참석했다. 초기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시작으로 청춘 3부작,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상실의 시대> 등......


북카페 ⓒ Ssung


초반에는 이 모임에 가기 위해 책을 ‘완독’ 하는데 개인적인 의미를 두었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려니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하루키의 유명세와 인기답게 독서모임에 오는 사람들은 작가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했다. 이미 읽은 작가의 여러 책들을 비교해가며 독후감을 쏟아내곤 했다. 나는 모임 내내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마치기 일쑤였다. 그래도 나는 책 한 권을 다 읽어서 뿌듯했고 멤버들의 의견을 들으며 내가 놓친 부분이나 다른 관점들을 되짚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하루키 모임은 마지막 <기사단장 죽이기>에 이르기까지 1년 하고도 4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점차 세계 문학 모임이 더해지고 한국 문학, 비문학, 시 등 모임은 계속 늘어나서 한 달에 모임 네 개를 소화해야 하는 달도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잠과 TV 시청 시간, 술을 줄여가면서까지 이곳에서 책을 읽고 멤버들과의 교류를 가지고자 했다.


하루키 장편 완독 기념 ⓒ Ssung


회사에서 유독 힘들었던 날이나 특별한 약속이 없지만 바로 집으로 가기 싫은 금요일 저녁엔 자연스레 이곳으로 향했다. 여기 오면 자연스레 새로운 책들을 소개해주는 아니 “영업”하는 사장님과 다음 모임을 위해 같은 책을 읽고 있는 멤버 한두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린 카페에서 삼삼오오 모여 책 수다를 시작으로 일, 사랑, 진로 고민 등 이야기 꽃을 피웠다. 언제부턴가 해외 여행을 가면 으레 서점에 들러 현지 언어로 된 하루키의 책을 사오거나 멤버들에게 기념품으로 책갈피를 선물하기도 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멤버는 직접 음식을 만들어와 나눠 먹기도 하고 연말이면 카페에 모여 각자의 ‘올해의 책’을 공유하고 술 한잔 기울이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북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책에 대한 나의 애정도 깊어지고 완독 리스트도 늘어났다. 이젠 좋아하는 작가나 책 취향도 제법 생겨 나만의 책장을 채웠다.

그러나 지난해 말 북카페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우리의 책 모임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젠 토요일에 늦잠도 실컷 자도 되고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여유롭게 읽어도 되었다. 하지만 토요일 오전의 공백은 마치 이별의 후유증처럼 큰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한동안 책도 안 읽히고 헛헛했다. 앞으로는 어떤 독서모임이나 북카페를 가도 깨끗하고 불빛 환하게 반겨주던 그만한 공간은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