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선_첫번째
안영란
56세
서울특별시 중랑구 거주
Prologue by 딸 송수련
엄마는 스물한 살에 맏며느리가 되었고, 저를 낳았을 때의 나이는 스물아홉인 지금의 저와 비슷합니다. 심지어 본인이 장남과 결혼할 거라는 환상이 있었대요.
엄마는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비디오 가게 주인, 마트 주인, 고등학교 급식 조리사,
작은 붕어빵 포장마차, 작은 분식집, 온갖 파출 업무에 인테리어 일까지…….
제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열 손가락도 모자라요. 지금은 간호조무사 업무를 10년 가까이하고 계십니다. 제가 40대가 될 때까지 앞으로 10년 동안 엄마처럼 일할 수 있을까요? 50대가 다 되어서 새로이 간호조무사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엄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의 저는 애써 엄마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다면 지금 당장의 생계가 휘청일지도 모르니까.
백 가지의 잘해준 것보다 못 해준 한 가지가 자꾸 생각난다는 게 이런 건가 봐요.
하나, 그녀의 처음
어린 시절 안영란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전라남도 나주에서 목수이신 아버지와 생선 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2남 6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옛날 아궁이 불 때는 초가집에서 살면서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언니와 함께 직접 밥 차려 먹고 동생들을 챙겨 왔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착해야 한다.’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 ‘부모님에게 좋은 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봉사 활동도 많이 다녔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어요.
당시 영란 님도 상당히 어렸을 텐데 일찍 철이 들었나 봐요. 어릴 적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저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해주셨어요. 아버지가 타 지역에 집 지으러 갔다가 오시면 항상 저를 목말 태워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아버지가 영화를 좋아하셔서 저를 데리고 극장에 자주 가셨어요. 거기서 항상 아이스케키와 새우깡 한 봉지를 사주곤 하셨어요.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아버지 따라 극장에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어릴 때부터 극장에 다니셨군요. 혹시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 기억하세요?
어렸을 때 극장에서 영화 <벤허> 봤던 게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한국 영화들은 사실 국민학교 입학 전이라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래도 그 시절부터 아버지 따라 극장 다니면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요즘도 혼자서 영화관 가기도 하고 영화 보는 걸 즐기는 편이에요.
착하고 성실한 딸이자 학생이었던 영란 님에게도 처음으로 반항하거나 방황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부끄러워서 말 안 하려고 그랬는데(웃음) 있었죠. 중학생 때까지는 장학금 받아서 다행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되더라고요. 중3 때 그걸 깨닫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는데요. 그때 실망이 컸고 상처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욕심은 많은데 막혀 있는 게 너무 많으니까 좌절이 컸어요. 아버지가 그때부터 중풍이 와서 일을 못 하시게 되면서 제가 더 경제적으로 책임감을 느끼게 된 거예요. 공부를 하고는 있었지만 비전이 없는 상태였어요. 또 사춘기랑 맞물려서 현실 도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그랬어요.
사춘기 때인데 상처가 컸겠어요.
그러다 중3 여름방학 때 사고를 쳤어요. 가정 방학 숙제로 레이스 실 뜨개질을 해가야 하는데 재료 살 돈은 없고 엄마한테 말은 못 하고 방학은 끝나가는데 그 숙제만 못 해서 혼자 끙끙대고 있었죠.
운동 연습을 마치고 학교 건물에 올라가는데 2층 복도 계단에 교감 선생님의 레이스 실이 너무 예쁘게 장식이 되어있는 거예요. 저는 실이 없어서 숙제를 못 했잖아요. 그때 그게 눈에 들어온 거죠. 충동적으로 그걸 잘라서 훔쳐 왔어요. 저는 그걸 학교에 과제로 제출했죠. 제가 과제물을 내기 전에 이미 학교는 뒤집혔어요. 개학했는데 교감 선생님 작품이 칼로 찢어져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저 때문에 엄마가 학교에 불려 갔어요. 엄마는 교무실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비셨겠죠. 이전까지 엄마,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었는데 그 일로 평생 가슴에 죄책감을 느끼게 됐어요.
그동안 모범적인 학생으로 인정받았던 덕에 선처를 받아서 반성문만 쓰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때 일만 생각하면 부모님께 죄송하고 수치스럽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사기 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자.’라는 신념을 갖고 열심히 살아왔어요.
살면서 ‘처음’이라 떨리고 설레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남편을 처음 만난 날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요. 영산 버스터미널에서 4월 1일 만우절에 처음 만났어요.
당시 소개팅 이런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의 친구인 남편한테 물건 전해주러 간 거였거든요. 저는 공장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이고 남편은 목포에서 운동선수 생활을 하고 주말이라 나주로 올라오는 길에 만나기로 했던 거죠. 스무 살 때였는데 학교나 교회 밖에서 남자를 만나는 게 처음이어서 너무 떨렸어요. 남편이 그리 잘생긴 것도 아니고 못생긴 것도 아닌데 태어나서 그렇게 심장 떨리는 걸 처음 느꼈어요.
첫눈에 반하셨나 봐요.
맞아요(웃음).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였다니까요. 그때 얼마나 좋았는지 떨어져 있기 싫어서 결혼까지 했어요. 첫 만남에서 결혼까지 2년도 채 안 걸렸어요.
그럼 ‘처음’이라 미숙하고 두려웠던 순간에 대한 기억도 있으신가요?
모든 처음 시작하는 것에서는 두렵고 어렵고 미숙하지만, 첫 아이를 낳을 때가 가장 떨리고 두려웠던 것 같아요.
그때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 작은 질 통로로 큰 아이가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또 잠자는 시간에 아이가
나오면 어떻게 하냐고 엄마에게 물었어요. 또 산부인과 주기적 검진에서 산도가 좁아서 자연분만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는데 어려운 산통 끝에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둘, 그녀의 일상
요즘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세요?
온 가족이 함께할 때요. 다들 바쁘니까 다 같이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특별히 어딜 가거나 뭘 하지 않아도 네 식구가 함께 시간 보내는 자체만으로도 좋아요. 얼마 전 가족 여행 갔을 때 제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아들, 딸이 “다음에 또 해줄게요”라고 말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저 나이 때 부모한테 맞춰서 해주기가 쉽지 않은 걸 아니까 자식들이 뭐 하자고 하면 저는 무조건 하겠다고 해요. 제가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 목마 타고 극장 갔던 추억거리들이 있는 것처럼 저도 자식들에게 그런 것들을 만들어주고 싶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아들, 딸이랑 배낭여행도 하고 해외여행도 가고 맛난 것도 먹으러 가고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요.
최근 새롭게 배우거나 시도한 일이 있으신가요?
얼마 전부터 딸의 권유로 프리다이빙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원래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 때문에 물을 무서워해서 물가는 잘 안 갔거든요. 그런데 나이를 많이 먹다 보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더라고요. 딸이랑 같이 하니까 겁도 나지 않았어요. 같은 걸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요. 물론 물속에서 내 생각대로 잘 안 움직여져서 가장 기본 스킬인 ‘덕다이빙’ 익히는 데도 4주나 걸렸어요. 마침내 성공하고 나니 기쁘고 스스로 자랑스럽고 딸 보기도 덜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도 덜해졌어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해낸 것만으로도 대단하신걸요. 축하드려요.
평소 쉴 때는 주로 뭐 하며 지내세요?
영화 보거나 화초 가꾸고 등산도 다녀요. 어릴 때부터 숲을 좋아해서 산길 걷는 건 좋아하긴 했는데 등산을 본격적으로 다닌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아무래도 등산을 하려면 장비를 갖춰야 하는데 나를 위한 투자는 잘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 딸이 작년에 제주살이 하는 동안 한라산 가자고 장비 사주면서 꼬드겨서 등반하게 됐어요. 죽을 뻔했어요. 남들 가는데 못 갈 건 없다는 심정으로 올라갔는데 그 정도로 힘들 줄 몰랐거든요. 그래도 이런 기회 아니면 제가 언제 또 한라산을 가보겠어요.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을 찍고 나니까 겁이 없어지더라고요.
여기 안산도 와보셨어요?
네, 서울에서 안산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두 번 정도 와봤어요. 올 때마다 다른 루트로 걸어서 서대문구청 쪽은 처음이에요. 스틱이랑 등산화도 생겼으니 자주 써먹어야죠. 서울 시내를 목표로 잡아서 다 다니겠다 하고 지도를 찍고 수락산, 아차산, 도봉산, 북한산 등 다녀왔어요. 그리고 서울에 있는 도성 투어도 다 했고요. 등산해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험한 산을 가면 힘들고 다리는 아프긴 하지만 집중하다 보면 잡생각도 안 하게 되고 공기도 좋고 건강에도 좋잖아요.
셋, 그녀의 꿈
어릴 적 영란 님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일하고 오시면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그 덕에 저도 책을 좀 많이 읽었거든요. 사춘기 때 수필도 많이 써서 글짓기 대회에 가서 상도 많이 받고 했었죠. 여동생들이 글쓰기 숙제 있으면 제가 쓴 시를 베껴서 많이 제출하기도 했었어요. 겁도 없이 내가 우리나라에서 첫 노벨문학상을 받겠다고 생각했다니까요(웃음).
문학소녀셨네요.
하지만 너무 가난하고 형제가 많아서 나를 위해 무엇도, 어떤 투자도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가족을 위해 양보하고 배려해야만 하는 삶이었습니다. 중학생 때까지 육상 선수를 했던 것도 솔직하게 말하면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였어요. 당시 시/군/도 대회가 많았는데 학교 대표로 나갈 때마다 짜장면을 사줬거든요. 운동 분야에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짜장면 때문에 운동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그럼 학업은 어떻게 유지하셨어요?
우리 때는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학비를 내야 했으니 원래 못 가는 거였죠. 제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었으니까요. 저도 언니처럼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다른 지역 공장으로 일하러 가야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입학시험을 봤는데 덜컥 장학생이 되어 학비 면제를 받게 된 거예요. 제가 성적 유지만 잘하면 학비는 따로 안 내도 되니까 집에서도 다행히 중학교를 보내줬어요.
솔직히 제가 욕심이 많아요. 운동부라 커트라인만 넘으면 체육 특기생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게 싫어서 오후 운동 연습 마치면 매일 도서관 가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했어요. 코피 흘려가면서 성적 우수자로 100% 장학금 받고 다녔어요.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적도 좋았는데 학업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 때문에 중3 때 크게 좌절하고 방황의 시간을 보냈었죠.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고입 시험만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배려해줘서 광주에 있는 인문고에까지 가서 시험을 봤어요. 합격했는데 못 가니까 절망이 심하더라고요. 속상해서 교회 가서 울고 그랬어요.
마침 제가 살던 지역에서 각 출신 학교별로 성적이 좋은데 광주나 대도시로 못 간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저를 안타깝게 여기신 담임 선생님이 상업고에 학교장 추천 장학생으로 넣어주신 거예요. 저는 이미 마산 공장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어서 이걸 부모님께 말도 못 꺼냈죠. 그런데 담임 선생님께서 직접 엄마 장사하는 데까지 찾아가서 고등학교 보내자고, 더 배워서 좋은 데 가게 하자고 설득을 해주셨어요. 그렇게 고등학교도 무사히 진학해서 졸업 후 취직도 할 수 있었고요.
영란 님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매일매일 잘 살고 잘 죽고 싶어요.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을 때 죽음에 대해서 좀 깊이 있게 생각을 해볼 수 있었거든요. 제가 크리스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내가 있는 자리가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자리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세상의 잣대로도 괜찮은 자리에 있어야 하기에 더 열심히 살 게 되는 것 같아요. 죽음은 많이 생각하고 준비해 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를 위해 준비하거나 노력하고 계신 것들이 있을까요?
몇 년 전부터 유서를 계속 써오고 있어요. 제가 죽었을 때 자식들이 허둥대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통장 비밀번호부터 장기 기증, 그리고 내 장례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정리하고 있어요.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서 제 육성으로 성경을 녹음하고 있어요. 나중에 사진으로 모습은 볼 수 있겠지만 엄마 목소리가 그리울 때도 있을 테니까 그때 들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성경 통독하려면 양도 많고 피곤하지만 내년에는 이 목소리가 안 나올 수도 있잖아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히 살아요. 이렇게 열심히 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거 하다 보면 나중에 죽었을 때 자식들한테도 좋게 기억될 수 있을 테니까요.
Epilogue(by interviewer)
여전히 새로운 것에 호기심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그녀이다. 하지만 막상 원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면 그녀는 어쩐지 명쾌한 답변을 하지 않는다. 매사 주관이 뚜렷하고 단호한 그녀이지만 어째 본인을 위한 투자 앞에서는 머뭇거리다가 “됐다”는 말로 얼버무린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것부터 생각하게끔, 가족들 얼굴을 먼저 떠올리게끔 하는 모양이다.
곧 다가올 그녀의 생일에는 나도 수련 님처럼 그녀가 좋아할 법한 걸 찾아 권해볼 참이다. 분명 갖고 싶은 것을 물어보면 “없다, 됐다.”라는 답변만 돌아올 것이 분명하니. 내 돈 주고 사기엔 아깝지만 있으면 좋을 만한, 해보면 좋을 만한 걸 선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