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꼽은 지구에서(on earth) 가장 아름다운 서점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다. 백 년 전 1919년부터 오페라, 탱고 공연장으로 쓰이던 장소가 경영난으로 매각되었고, 2000년에 건물의 새 주인은 오페라 극장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서점으로 문을 열었다. 그렇게 생긴 서점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히는 '엘 아테네오, El Ateneo'이다.
오페라를 공연하던 무대는 카페가 되었고, 객석이 있던 공간은 책과 책꽂이로 가득 채워졌다. 로열박스가 있던 이층과 삼층의 공간도 서가로 채워져 있었으며 난간에서 카메라를 들면 아름다운 서점의 모습을 하나의 사진 파일로 담을 수 있다. 책을 고르다가 고개를 들면 어디서라도 오페라 극장의 아름다운 흔적들을 책과 함께 볼 수 있었다.
여행 중에 '엘 아테네오'를 위해서 할애하여 둔 시간이 다 지나고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도서관은 유럽에 여러 군데 있었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엘 아테네오' 만큼 멋진 서점을 본 적은 없었다. 곧 '엘 아테네오'를 빠져나가면 다시는 비슷한 곳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생기고 있었다. '엘 아테네오'서점은 첫 만남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나 헤어지기 싫은 베프와의 마지막 소주잔, '한잔만 더' 같은 마음이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알고 그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엘 아테네오'를 빠져나오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람들을 '포르테뇨, Porteno'라고 부르는데 '항구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포르테뇨, 항구의 사람'이라는 말로 자신들을 불렀을 만큼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항구를 중심으로 비즈니스가 발전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을 가진 포르테뇨의 지금 경제 상황은 나쁘다 못해 최악의 상황이라고 한다. 악순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제 불황과 화려한 서점 '엘 아테네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백화점에서 새 옷을 살 돈이 없어도 책을 사서 읽는 것이 포르테뇨의 삶이라는 뜻도 된다. 포르테뇨들의 책과 서점에 대한 사랑은 객관적인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구 십만 명당 서점의 수가 가장 많은 도시가 바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이다. 100,000명당 서점이 25개라고 하는데 시민 4000명당 서점이 하나씩 있는 셈이다. 인구당 서점의 비율이 두 번째로 높은 곳이 100,000명당 22개인 홍콩이라고 한다.
역설적이라 놀라웠던 점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에도 있었다. 경제 상황이 어려운데도 서점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심가를 걷다 보면 1분이 채 되지 않아도 서점을 계속 발견할 수 있다. 서점은 모두 위치가 좋은 번화가의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 시내를 걸으며 카페나 화장품 가게를 만날 수 있는 곳마다 꽤 큰 규모의 서점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이다. 책의 가격도 20달러에서 40달러 정도로 우리나라보다 비싼 편인데도, 포르테뇨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을 구입하고 읽는 사람들이었다. 엥겔지수처럼, 소득에서 책을 구입하는 비율을 알 수 있는 지표가 있다면 아마도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가장 높을 것이다.
엥겔지수가 높다는 것은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의미가 되지만, 책을 소비하는 비율이 높다는 지표는 시민들의 지적 내공이 높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경제 상황은 어렵지만 포르테뇨들의 지적 내공은 계속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경제 불황을 이겨내는 방법을 찾아 다시 경제가 일어선다면 파리와 비교되었을 만큼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일구었던 100년 전 전성기의 모습을 언제든지 다시 되찾을 수 있겠다는 내공이 느껴졌다.
악순환의 연속이라는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지독한 경제 불황에도 서점에 대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엘 아테네오의 주인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의 책과 서점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지는 상황이라면 옷을 덜 사 입고, 외식을 줄이며, 지출은 줄이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은 책을 구입하는데 쓰는 돈은 아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너무나 어려워졌다는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채용을 하는 기업들도 내면의 힘을 믿기보다 외면의 모습도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상황이 늘어만 간다. 졸업을 하고 회사원이 되어 승진과 이직을 반복하면서 월급도 같이 올라갔다. 올라가는 월급만큼 더 비싼 코트나 수트를 구입했다. 반대로 책을 구입하는데 쓰는 돈을 늘이려는 노력은 기억에 없다. 내면의 힘을 키우려는 생각보다는 옷을 사고 즐거워하는데 관심을 보이며 살아왔다. 드레스룸이나 옷장(wardrobe)은 항상 옷으로 가득했고, 이사를 다니며 서재는 자리를 잃고 거실 한편에 책꽂이로 축소되어 버렸다.
'Wardrobe'는 옷장이나 때와 상황에 맞춰 나를 빛내줄 옷들의 집합체, 옷장 속의 패션 아이템 전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Wardrobe를 예쁜 옷들로 가득 채우는 것만큼 나의 책꽂이,'bookshelf'를 채워가며 사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 지적 내공은 반드시 성장하게 된다. 책으로 높아진 지적 내공은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아름답게 해 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멋있고 예쁜 옷으로 나를 꾸며도 외적 아름다움은 곧 한계가 오거나 퇴보하게 되지만, 꾸준히 책을 읽으며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의 지적 아름다움은 무한대로 커질 것이다.
오랜 불황으로 먹고사는 것도 어려움이 된 포르테뇨의 wardrobe는 화려함을 잃어가고 있겠지만 그들의 bookshelf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서점 '엘 아테네오'를 만든 그들의 내면은 더욱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이번 주말엔 백화점이나 쇼핑몰 대신, 서점에서 책을 쇼핑하며 비어 가는 머리와 공허한 마음을 다시 채워야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