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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굿 오피스

2026년 새벽 3시, 철학하는 CEO와 가상 이사회

by 김홍재

1. 새벽 3시의 적막, 고독한 CEO


2026년 어느 화요일 새벽 3시. 적막이 감도는 CEO 집무실에 당신은 홀로 남겨졌습니다. 경쟁사의 혁신 기술 발표로 주가는 폭락했고, 늦은 시간 임원들은 자리를 떴습니다. 리더의 판단력이 가장 흐려지는 '고독한 정상(Lonely Top)'의 시간.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보안 노트북을 켜고 시공간을 초월한 '나만의 가상 이사회 (Executive Board)'를 소집합니다.


화면 왼쪽에서 검은 터틀넥을 입은 스티브 잡스의 페르소나가 당신의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매섭게 쏘아봅니다. "One More Thing으로 감동이 필요해요. 고객은 이정도에 만족하지 않아요. '편의' 때문에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말아요. 직관적인 경험을 위해, 당장 갈아엎으세요."


그의 독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에서 이건희 회장의 페르소나가 나직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끼어듭니다. "주가가 빠지는 게 두렵습니까? 진짜 위기는 당신의 안일한 태도입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보십시오. 경쟁사를 쫓아갈 생각 말고, 아예 판을 엎어버릴 압도적인 '초격차' 기술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맞은편의 인드라 누이(PepsiCo 전 CEO)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직원들의 마음을 붙잡을 내러티브는 있느냐"고 묻고, 화면 한구석의 일론 머스크는 "겨우 생존이 목표냐, 화성 갈 스케일로 10배(10x) 성장을 노려라"며 도발합니다.


이것은 SF 소설이 아니라, 2026년 어느 CEO 오피스에서 일어날 모습이 아닐까요. 생성형 AI가 정교한 철학적 자아를 갖춘 '에이전트 AI'로 진화한 2026년의 현실적인 풍경이지 않을까 합니다. AI 임원들과 가상 멘토 혁신 기업가들은 눈치를 보느라 침묵하는 부하 직원과 달리, 당신에게 가장 뼈아픈 진실을 가감 없이 조언합니다.


2. 충돌하는 정답들 : AI는 '방법'을 찾지만, 인간은 '방향'을 정한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가상 이사회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 '정답의 과잉'입니다.

잡스는 '단순함'을 위해 기능을 빼라 하고, 머스크는 '혁신'을 위해 기능을 더하라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위기감'을 강조하며 조직을 조이라고 하는데, 인드라 누이는 '안정감'을 위해 조직을 다독이라고 합니다. 각각의 페르소나, 즉 각각의 AI 에이전트는 자신에게 학습된 데이터와 철학적 논리에 따라 완벽한 정답을 내놓습니다. 문제는 이 정답들이 서로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AI는 수만 가지의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최적의 경로를 제안할 수 있지만, 정작 "우리 회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효율을 위해 직원을 해고할 것인가, 비용을 감수하고 사람을 지킬 것인가. 이것은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입니다. 결국 쏟아지는 조언의 홍수 속에서, 어떤 가치를 최우선에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우선순위의 설계자'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당신이어야 합니다.


2026년에도 AI는 결정의 순간 당신의 선택을 기다릴 것입니다.


3. 압축된 시간, 드러나는 본질: 결국 리더의 철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가상 이사회의 가장 놀라운 점은 '효율성'입니다. 과거라면 몇 달이 걸렸을 시장 분석, 전문가 자문, 내부 토론이 AI 에이전트들의 도움으로 단 30분 만에 끝났습니다. 잡스의 직관, 이건희의 위기론, 머스크의 파격이 당신의 책상 위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잡음(Noise)이 사라지고 모든 정보가 투명해진 순간, 리더가 짊어져야 할 고뇌의 밀도는 더욱 높아집니다. 이제 "데이터가 부족해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에이전트들이 밥상을 완벽하게 차려놓았기에, 수저를 어디로 뻗을지는 오직 당신의 '철학'에 달려 있습니다.


회의는 짧게 끝났지만, 당신의 사색은 길어집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고독 끝에 당신이 내린 단 하나의 결단은, 대기하고 있던 수천 명의 에이전트들을 통해 즉시 실행으로 옮겨집니다. 기술이 완벽해질수록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기술 격차가 아니라, 그 기술을 지휘하는 리더의 '철학적 격차'가 됩니다. 가장 위태로운 위기의 순간, 회사를 구하는 것은 최첨단 AI가 아니라 당신이 오랫동안 다듬어온 단단한 신념입니다.


4. 적막이 돌아온 방, 마지막 버튼은 누구의 것인가


새벽 4시. 당신은 가상 이사회의 종료 버튼을 누릅니다. 스티브 잡스도, 이건희 회장도, 일론 머스크도 화면 속으로 사라집니다. 떠들썩했던 토론은 끝났고, 방 안에는 다시 노트북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당신의 숨소리만 남습니다.


수천 명의 천재적인 AI 참모들이 완벽한 데이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전 세계의 자율 에이전트들이 당신의 신호를 기다리며 대기 중입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AI도 당신 대신 'Enter' 키를 눌러주지는 않습니다. 그 결정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는 데이터로 환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상 이사회가 당신의 고독을 덜어주었을까요?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수많은 길을 보여주었지만, 그중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야 하는 것은 오직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었으니까요.

2026년의 새벽, 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해졌지만, 리더의 어깨는 여전히 무겁습니다. 결국 경영이란, 그리고 리더십이란, 차가운 데이터의 바다 위에서 뜨거운 인간의 가치를 지켜내는 외로운 항해일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화면이 꺼진 검은 모니터에 당신의 얼굴이 비칩니다. 이제, 당신이 결정할 시간입니다.



MIT 슬론 보고서, Vipin Gupta가 상정해 본 가상 AI 보드 미팅에 관한 글 'How I built a Personal Board of Directors with Gen AI'를 읽고 상황을 가정해서 썼습니다. Vipin Gupta는 제약기업에 기술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FlipRX의 CTO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라, 상황만 빌려서 저의 이야기를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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