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캠핑을 다니진 않지만, 캠핑 유튜브를 챙겨보는 건 좋아합니다. 히말라야 원정급 텐트나 가벼운 신소재로 만든 기능성 장비들은 보기만 해도 흥미롭습니다. 러닝이든 자전거든, 우리는 새로운 취미를 시작할 때 일단 최고급 '장비'부터 갖추며 몰입하곤 합니다. 비록 동네 공원용, 동네 러닝일지라도, 때로는 '오버스펙' 장비가 주는 설렘은 취미 영역에서만큼은 즐거운 사치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씁쓸하게도, 요즘 우리 기업들이 AI를 도입하는 풍경을 보면 이와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다만 기업의 경우는 이것이 '취미'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점이 다릅니다. 기업들은 앞다퉈 챗GPT 엔터프라이즈니 코파일럿이니 하는 최첨단 'AI 페라리'를 비싼 구독료를 내고 도입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페라리를 '울퉁불퉁한 비포장 자갈길' 위로 몰고 갑니다.
현장의 김 대리는 모니터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상무님, 수십만 원짜리 AI 계정을 주시면 뭐 합니까? 보안 정책을 이유로 내부 데이터는 한 글자도 넣지 말라면서요. 엔진 망가진다고 고급휘발유는 넣지 말고 달리라는 격입니다. 텅 빈 프롬프트 창에 제가 일일이 회의 내용을 다시 타이핑하고 있으면, 이게 AI 자동화인지 타자 연습인지 자괴감이 듭니다.
게다가 어찌어찌 결과를 만들어도, 다시 사내 보안망에 접속해서 문서파일로 만들어서 이메일이나 시스템에 첨부해서 컨펌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걸 빨리 끝내도 성과보다는 '야근'을 더 높이 사는 평가 문화는 그대로인데... 기업용 수십만원짜리 AI만 구독해주면 뭐하냐고요"
현재 대기업들이 겪고 있는 'AI 생산성 역설’이라고 여기저기서 듣고 있답니다. 아니면 구성원들이 아직 AI를 잘 쓸줄 몰라서 그렇다고 AI 교육 프로그램만 찾기도 하고요. 엔진(AI)은 시속 300km를 달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 우리가 닦아놓은 '일의 도로(프로세스와 평가 시스템)'는 여전히 곳곳에 깊은 포트홀(도로 파임)이 도사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심지어 보안을 이유로 페라리의 바퀴마저 묶어놓은 꼴입니다.
경영진은 "도로 사정은 무시한 채, 비싼 페라리를 사줬으니 무조건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을 합니다. 하지만 정작 데이터를 넣지 못해 깡통이 된 AI와, 꼬일 대로 꼬인 업무 프로세스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합니다. 도구만 쥐여주면 마법처럼 해결될 거라 믿는 것은, 포트홀 투성이의 도로에서 F1 레이싱을 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AI는 근본적으로 망가진 조직 시스템을 해결해 주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1.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모호한 업무 분장 (Allocation),
2. 알맹이 없는 보고가 이어지는 비효율적인 프로세스 (Process),
3. 실질적 성과보다 야근을 더 높이 사는 낡은 평가 (Review)
이런 시스템이 과거와 같이 존재하는 한, AI는 그저 '클러치 조절만 힘겨운 애물단지 스포츠카'와 크게 다르지 않네... 라는 생각이 듭니다.
MIT 슬론 매니지먼트 리뷰(MIT Sloan Management Review)의 저자 Ravin Jesuthasan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 중심'이 아닌 '업무 중심(Work-backward)'의 접근을 제안합니다. 직무를 과업 단위로 쪼개(Deconstruct) 재배치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할을 새롭게 정의(Reconstruct)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MIT 슬론 리뷰에 소개된 한 글로벌 금융 회사는 '도로 공사'를 감행했습니다.
첫째, 신입 사원의 퇴사 원인이었던 단순 입력 업무를 AI에게 넘기고 과감히 데이터 분석 역할을 맡겼습니다. 둘째, 내부 결재를 위한 서류 작업을 없애고, 그 시간에 고객의 불편을 직접 해결하는 데 집중하도록 프로세스를 전환했습니다. 셋째, 평가의 기준을 '입력 건수'에서 '고객 인사이트 도출'로 옮겼습니다.
결과는 업무량 50% 감소, 이직률 18% 감소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좋은 차(AI)를 샀기 때문이 아니라, '차가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를 새로 깔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AI 상황을 가정하고, 업무 프로세스에 Streamlining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실제로 과감한 투자를 했던 기업 두 곳을 처음 접했던 것은 2015년, 2016년의 일입니다. 알파고와 이세돌 님이 광화문에서 역사적인 대국을 벌였던 즈음의 오래전 일입니다. AI가 오피스에 온다를 가정하고, 업무 문화와 업무에 불합리한 반복(Redundancy)이 없는지 살피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많은 리더들이 "우리 회사는 AI를 도입해도 효과가 없어"라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되물어야 합니다. 회사의 업무 도로는 제대로 포장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그 페라리에 기름(데이터)을 넣을 방법은 있는지 ?
보안을 핑계로 주유구를 막아버리기보다,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현실적인 보안 대책을 치열하게 고민해보셨습니까? 미래의 경쟁력은 직원들이 AI 사용법을 배우고 기술을 숙련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AI가 잘 달릴 수 있도록 낡은 시스템을 고치고, 꼬인 업무 분장을 해결하고, 성과 중심의 합리적인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리더, 즉 '설계자(Architect)'의 결단이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비싼 페라리를 샀다면, 도로 포장 공사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도로가 뚫리는 순간, 당신이 진짜 가고 싶었던 그곳으로 충분히 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Ravin Jesuthasan, "Want AI-Driven Productivity? Redesign Work" (MIT Sloan Management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