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 로테이션 3
어제의 전문성이 오늘의 낡은 기술이 되어버리는 이 가혹한 현재 비즈니스의 속도전 속에서, 직장인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단어는 '해고'가 아니라 '도태'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5년 뒤에도 존재할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이는 드뭅니다. 기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우물만 파던 '스페셜리스트'들로 가득 찬 조직은 변화의 급류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침몰하곤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체된 물처럼 고인 조직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며 형태를 바꾸는 '유연한 조직'입니다. 그 핵심 동력이 바로 'Job Rotation'입니다.
직무 순환은 단순히 자리를 옮기는 '인사 발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직의 근육을 단련하는 네 가지 방식의 훈련입니다.
첫째, 기능 간 순환(Cross-functional Rotation)은 조직의 고질병인 '사일로(Silo) 효과'를 타파하는 가장 강력한 처방전입니다. 마케터가 영업 현장의 땀방울을 경험하고, 인사 담당자가 재무의 냉철한 숫자를 읽을 수 있을 때, 조직은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때 탄생하는 '통섭형 리더'는 부서의 이익이 아닌 회사의 비전을 먼저 보게 됩니다.
둘째, 지역 간 순환(Geographic Rotation)은 물리적 경계와 함께 마음의 경계를 허뭅니다. 본사에서만 근무하던 직원이 낯선 해외 법인의 현장으로 뛰어들 때, 소통의 장벽은 무너지고 글로벌 표준은 자연스럽게 몸에 이식됩니다. 그것은 세계라는 거대한 지도 위에서 자신의 좌표를 재설정하는 과정입니다.
셋째, 기술적 심화 순환(Technical Deepening)은 전문가의 치명적인 약점인 '매너리즘'을 방지합니다. 엔지니어가 R&D 내의 세부 팀을 오가며 기술적 시야를 확장하는 과정은, 마치 칼을 숯돌에 갈 듯 자신의 전문성을 더욱 날카롭고 깊게 만듭니다.
넷째, 단기 프로젝트형 순환(Project-based Rotation)은 가장 '힙(Hip)'하고 애자일한 방식입니다. 본업의 안전벨트를 매고서 타 부서라는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는 이 방식은, 리스크 없는 직무 탐색을 가능케 하며 조직 전체에 촘촘한 협업 네트워크를 구축합니다.
잡로테이션은 신입 사원뿐 아니라 조직의 허리인 경력 직원들에게도 새로운 동력이 됩니다. 특히 다른 지역에서 일하는 두 구성원이 일정 기간 자리를 맞바꾸는 '포지션 로테이션(Position Rotation)'이나, 반복되는 업무의 지루함을 덜어내는 '태스크 로테이션(Task Rotation)'은 경력직의 심리적 무료함을 지우는 훌륭한 해법입니다. 물론 가족이 있는 경력직에게 지역 이동은 부담이 될 수 있고, 태스크 로테이션은 단기적 효율 면에서 숙제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만큼은 확실합니다.
더 나아가 잡로테이션은 이제 개별 기업의 담장을 넘고 있습니다. 팹리스(Fabless) 반도체 설계 기업과 파운드리(Foundry) 생산 기업이 직원을 교환하며 고객사와 공급자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사례나, 반도체 전공정(Front-end)과 후가공(Back-end) 기업 간의 교환 근무가 대표적입니다. 거제도 조선소와 프랑스 가스플랜트 설계 기업이 인력을 교류하며 기술적 시너지를 내는 장면도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업 간 로테이션은 단순한 파견을 넘어 네트워킹, 마케팅, 직원 연수의 장이 됩니다.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를 맺은 기업들이 서비스 호환성을 높이거나, 보험사와 은행이 신시장(아시아, 유럽)에서 특정 국가의 비즈니스를 함께 개척하기 위해 직원을 교환 근무시키는 사례는 잡로테이션의 비즈니스 효용성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전략적 제휴 과정에서 필요한 잡 로테이션에는 정보 보안이나 비용 분담 같은 기획의 난이도는 높지만, 신입 시절부터 협력 또는 제휴 관계에 있는 다른 기업과 잡로테이션을 경험한 구성원이 많은 조직일수록 훗날 이런 복잡한 전략적 로테이션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노하우가 탄생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리딩 기업들은 이미 이 유동성의 가치를 현장에 녹여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STEP(Samsung Talent Exchange Program)'을 통해 삼성의 DNA를 전 세계로 실어 나릅니다. 본사와 해외 법인 간의 인력을 교착하여 글로벌 역량을 키우는 이 시스템은 삼성전자가 어떻게 세계 곳곳에서 현지화에 성공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특히 1990년부터 이어온 '지역 전문가 제도'는 업무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지의 공기를 마시게 함으로써,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재가 어떻게 기업의 '뿌리'가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LG전자는 거인의 걸음 속에서도 주니어들의 성장을 잊지 않습니다. 'Early Talent Rotational Program'을 통해 신입 사원들이 입사 후 2년간 4개 부서를 거치게 하는 실험은, 신입 사원이 소모품이 아닌 '미래의 설계자'로 대우받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한편, SK하이닉스는 엔지니어가 관리직으로 빠지지 않고도 자신의 기술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 전문가(Master)' 트랙을 운영하며 전문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CJ그룹의 '커리어 챌린지(Career Challenge)'는 그야말로 파격적입니다. 비비고 만두를 만들던 직원이 영화 <기생충>을 만드는 엔터테인먼트 부문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 통로는, 상이한 산업군 간의 융합이 어떻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지를 증명합니다.
금융권에서는 하나금융그룹(하나은행)의 '경력개발 프로그램(CDP)'이 빛을 발합니다. 은행원이라는 틀을 깨고 자산관리(WM), IB, 자본시장 등 전문 분야를 선택해 '멀티 전문가'로 성장하게 돕는 이 제도는, 디지털 전환기 금융 인재가 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글로벌 대기업들도 Job Rotation을 '생존의 문법'으로 삼습니다.
구글(Google)의 '번지(Bungee) 프로그램은 이름부터가 짜릿합니다. 번지점프를 하듯 3~6개월간 다른 팀의 업무에 풀타임으로 뛰어들었다가, 프로젝트가 끝나면 안전하게 원래 팀으로 복귀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시스템으로 제거한 이 방식은 구글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넷플릭스(Netflix)는 '맥락(Context)의 공유'를 통해 직원의 자율성을 극대화합니다.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열람할 수 있는 환경에서 직원은 스스로가 어디에서 가장 큰 가치를 창출할지 판단합니다. 매니저가 유능한 팀원의 이동을 가로막는 것은 넷플릭스에서 '성장을 방해하는 행위'로 간주됩니다.
글로벌 금융의 자존심 JP모건 체이스(J.P. Morgan Chase) 역시 '내부 이동성(Internal Mobility)'을 신성시합니다. 사내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는 것이 외부 이직보다 훨씬 장려되는 분위기는, 조직 내의 소중한 지식 자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가장 강력한 방어선입니다.
이제 직무 순환은 더 이상 차가운 문서상의 '발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성원의 커리어를 시각화된 '테크 트리(Tech Tree)'로 제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1년 더 하면 어떤 새로운 건물과 유닛을 생산할 수 있도록 자원과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급하게 닥친 시장의 '아드레날린 저글링' 공세(경쟁사의 빠른 서비스/신제품 출시)를 막기 위해, 현장 지식이 뛰어난 '질럿' 직원들을 최전선에 배치하고, 그 뒤로 탄탄한 기술력과 인프라를 상징하는 '포토 캐논'과 ‘하이 템플러’를 정확한 위치에 배치하여 방어하는 '전략적 방어선 구축 미션'처럼 말입니다.
경영 시뮬레이션 교육 과정에서 시도한다면 '메딕' 힐러가 되거나 '다크 템플러' 침투 전문가 같은 위트 있는 칭호와 디지털 배지도 활용해서 Job Rotation을 구상해 볼 수 있겠지요.
결국, 이는 다양한 종족을 경험해본 주니어들이 조직 안에서 성장한 후에 고수가 되어 사용할 수 있는 '궁극의 테크 트리'를 완성하는 것 아닐까요?
되돌아보니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30대 초반이라는 가장 뜨거운 시기에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Job Rotation, 미국 동부에서 Branch Attachment, 그리고 서울 사무소에서 Dual Cap을 넘나들며 커리어를 넓힐 수 있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 모든 '성장의 기억' 뒤에는 나의 가능성을 믿어준 HRD 담당 코치의 헌신과, 다양한 기회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보듬어준 리더의 서포트가 있었습니다.
조직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지 직접 경험했기에, 저는 이제 그 가치를 다른 리더들과 나누려 합니다. 우리 조직의 주니어들에게도 그런 '인생의 변곡점'을 선물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실전 설계도와 글로벌 리딩 기업들의 인사이트를 이곳에 담았습니다. 당신의 리더십이 누군가의 가장 눈부신 성장 서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