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소중한 것들을 일깨워 준 셋째 주!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추자도에 들어가는 날이지만 기상악화로 배가 뜨지 않아 일정이 취소됐다. 곧바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일단 짐을 내려놓고 게하에서 조식을 먹으며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지난번 다른 여행객이 적극 추천했던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 오름을 가볼까 싶어 가는 길을 검색했다. 소요시간 2시간. 비도 오는데 버스 타고 2시간이나 갈 생각 하니 가고 싶은 마음이 스리슬쩍 사라졌다.
올레길처럼 호되게 걷지 말고 숙소 근처나 둘러보자는 마음으로 느릿느릿 동네를 걸었다. 걷다가 아라리오 뮤지엄 옆에 있는 종이잡지클럽에 갔다. 종이잡지클럽은 몇 년 전 서울 합정동에서도 갔던 공간인데 이름 그대로 잡지를 다루는 곳이다. 운영자가 내 관심사를 묻고는 잡지를 추천해 줬는데 굉장히 리드미컬했고 진정성이 느껴졌었다. 그 뒤로 재방문은 못했지만 SNS를 통해 소식을 챙겨 보는 곳이 됐다. 제주점은 발랄한 동네책방 같았다. 내가 보기엔 잡지보다 책이 더 많아 보였다. 방문자(여행자)들에게 '책 한 권 어때? 아니면 잡지도 너무 좋구!' 같은 분위기랄까? 제주점에는 전국 각지 동네책방들이 큐레이션 한 책과 소개글이 있었다. 책방 주인들은 수많은 책 중 단 두 권을 고르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까? 사서로 근무할 때, '이 달의 추천 도서' 코너에 들어갈 서평을 쓴 적이 있었는데 후루룩 해내는 옆 동료와 달리 나는 한 달이나 걸렸다. 어떤 책을 선택할지도 고민스러웠지만 내가 쓴 서평을 보고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싶었다. 북 마케터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독서 유발 포인트를 만들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소개글을 읽으며 '어쩜 이렇게 잘 썼지' 부러웠다. 누군가의 정성과 노고를 생각하니 매대 위 모든 책들이 읽고 싶었다.
책을 한 권 사들고 종이잡지클럽을 나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라 지인이 적극 추천한 우진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멀리서 봐도 유명 맛집이란 걸 알 수 있게 가게 앞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웨이팅 예상 시간을 물어보니 1시간 반 정도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국밥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렇게나 오래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 깔끔히 포기했다. 근처 다른 식당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다음 목적지인 제주사랑방으로 향했다. 제주사랑방은 옛 주택을 개조해 작은도서관 역할도 하고 커뮤니티 공간도 있어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되는 곳이다. 시끌벅적한 도심을 걸어 그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조용했다. 안채와 바깥채를 마주 두고 그 사이에는 마당이 있는데 단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한옥을 보니 '슬로 라이프'를 떠올리게 됐고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먹고, 천천히 읽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살아야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은 숙소 근처에 있는 '산지해장국'으로 향했다. 9시쯤 도착한 가게 앞에는 이미 여러 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일행과 함께 20분을 기다려 내장탕을 먹었다. ('마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내장 부속이 가득 담겨 있는 뚝배기는 비주얼부터 합격이다.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더니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흰쌀밥도 어쩜 그리 찰진지 국물에 말아먹으니 그간 먹었던 모든 국밥을 제치고 단연 1등을 차지했다. 산지해장국은 이 내장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 국밥을 갈아치웠을까? 오천만 국밥인들이 충분히 반할 맛이다.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끝내고 일행과 함께 서핑 체험을 하러 갔다. 난생처음 입는 서핑 슈트는 상당히 민망했다. 분명 옷을 입었는데도 벗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잘 감춰왔던 군살이 여실히 드러났다. 입기도 힘들고 벗기도 힘든 서핑 슈트는 보온만큼은 상당했다. 오락가락 비가 내리는 흐린 날이었지만 춥지 않았다. 간단한 이론 수업을 받은 후, 보드 위에서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춰 동작 연습을 했다. 평소 안 쓰던 근육까지 동원해 새로운 자세를 배우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는 몇 배 더 힘들었다. 그래도 열 번 중 한 번만 성공해도 즐거웠다. 연습할 때는 '이걸 파도 위에서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안 되는 건 없었다. 배울 때는 뭐든 어렵고 힘든데 막상 해보면 즐겁고 뿌듯하다. 바다에서는 아무리 넘어져도 아프지 않았고 바닷물이 코로 들어가도 신났다.
오늘도 자유시간을 갖게 됐다. 숙소에 있는 자전거를 빌려 아침부터 해안도로를 달렸다. 제주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요리조리 휘날렸다. 내리막길에서도 자전거는 시원하게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바람이 조심하라며 살포시 브레이크를 잡아 주는 것 같았다. (오래 전, 제주에서 자전거를 타다 앞 치아가 부러졌었다) 자전거를 타니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자전거는 거센 바람에도 잘 나가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낡은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오르막에서는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굴러갈 생각을 안 해 결국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차라리 자전거 없이 걸어 다니는 게 낫겠다' 싶어 숙소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걸었다. 역시 내 다리가 최고다!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카페에 앉아 막바지에 이른 제주 걷기를 되짚어 보았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코로나)으로나 여러모로 힘든 시기에 도전한 제주 걷기라 더없이 간절하고 소중했다. 응원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기에 더욱 건강한 결실을 맺고 싶었다. 내가 원하던 바를 얼마나 이루었는지, 이곳에서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정리했다.
드디어 오늘! 추자도행 배에 몸을 실었다. 아침 9시 30분에 출발한 쾌속선은 10시 40분쯤 추자항에 도착했다. 오래전 섬 여행 전문가의 강연을 듣고 섬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제주도도 섬이지만 추자도는 제주도보다 더 섬처럼 느껴졌다. 우도나 가파도와 달리 추자도는 배를 타고 더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1박을 해서인지 유난히 설레었다. 별들이 수놓은 밤하늘을 기대했지만 추자도의 밤하늘은 제주 밤하늘과 다르지 않았다. 밤하늘만큼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다른 것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제주 본섬과 달리 차와 인적이 드물어 조용한 추자도는 어느샌가 도시의 소음으로 지쳤던 내게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숲 속을 걷다가 무슨 소리가 들려 주위를 둘러보면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찌르찌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와 짹짹 거리는 새소리를 들으니 어릴 적 놀았던 할머니의 시골집이 떠올랐다. 무더운 여름에는 마당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할머니가 잘라 준 수박과 참외를 먹었다. 추운 겨울에는 뜨거운 온돌방에 두꺼운 이불을 펴고 아궁이에서 구워 온 고구마를 까먹었다. 비록 푸세식 화장실을 갈 때마다 똥통에 발이 빠지지 않을까 무서웠지만 할머니 집에서 보낸 스무 남짓의 방학은 내가 가장 아끼는, 소중한 추억이다.
돈대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하추자 풍경은 평화로웠다. 점처럼 작아진 건물과 움직이는 사람, 오토바이, 차를 보고 있노라면 소인국을 훔쳐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어릴 적 개미의 움직임을 봤던 것처럼 말이다.
민박집에서 먹은 찜닭은 육지에서 내로라하는 찜닭 맛집에도 뒤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대구에서 추자도로 이주 온 사장님의 사연은 알콩달콩했다. 남편이 낚시광인데 '나이 들면 추자도에서 낚시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해서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살아있는 남편 소원 하나도 못 들어주겠나' 싶어 추차도로 이주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추자도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신다고.
민박집에서 추자도 특산품인 참굴비를 아침으로 먹었다. 평소 굴비를 찾아 먹지 않아 특별히 맛있다는 느낌은 모르겠지만 아침으로 부담 없이 먹기 좋았다. 오늘은 추자도를 떠나기 전, 낚시 체험을 했다. 가장 저렴한 오천 원짜리 낚싯대를 빌려 용둠벙 근처로 갔다. 절벽 바위에는 이미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낚싯대에 갯지렁이를 끼어 파란 바다에 던졌다. 일렁이는 바닷물에 움직이는 찌를 바라보니 낚시에 환장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모든 정신을 찌에 집중시키니 잡념이 사라졌다. 그러다 지루해질라치면 앞에 펼쳐진 바닷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햇살을 받아 표면이 반짝반짝거렸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을 바다에 뿌려 놓은 것처럼 말이다. 눈부신 바다와 찌를 번갈아 보다 보면 시간이 더디 가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빠르게 흐른다. 끊임없이 찰랑이는 바닷물결을 바라보다 조물주가 떠올랐다. 그는 무슨 재주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창조했을까? (나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장비 탓인지 노하우 탓인지 다른 낚시꾼들은 잘도 잡는 물고기를 우리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결국 햇빛이 내리쬐는 절벽 바위를 나와 완만한 바위 근처로 이동했다. 그곳에선 낚싯대를 내려놓고 돌 틈 사이에 있는 성게와 작은 게들을 잡으며 놀았다.
그러다 운이 좋게 문어도 한 마리 잡았다. TV에서만 봤던 문어를 실제로 보니 징그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문어의 움직임은 굉장히 민첩하고 신중했다. 커다란 두 눈으로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듯했고 자신의 몸을 지키려 색깔을 바꾸거나 먹물을 뿜기도 했다. 커다란 돌을 걷어내고 빠르게 이동하는 문어를 잡아낸 대단한 일행 덕분에 갓 잡은 문어를 들고 민박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안타까운 문어의 심정을 잠시 떠올렸지만 삶아서 맛있게 먹었다. 맛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쫄깃한 문어 살에는 추자도 바다가 들어있었다. 평생 잊지 못할 맛이 하나 더 추가됐다.
마지막 올레길이었던 추자도를 끝내고, 완주증을 발급받으러 서귀포 여행자센터로 갔다. 현재는 7코스에 있는 올레 여행자센터에서만 완주증이 발급 가능하다고 한다. 그동안 스탬프를 열심히 찍은 올레 패스포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기다렸다. 얼마 후 직원은 완주증과 완주메달을 준비해 왔다. 완주증에 발급된 숫자와 메달의 의미를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곧이어 완주증의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던 와중에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왜 우시지?' 그녀의 눈물을 의아해하며 나 역시 벅찬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주르륵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라는 생각에 아름다운 추억들과 힘들었던 기억들이 뒤섞여 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끝'은 언제나 시원섭섭하다.
5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