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깍두기 안 좋아합니다’
도서관에서 프로그램 담당을 시작했을 때, 1년 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전임자는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는 파일 뭉치를 건네며 하루 만에 속성 인수인계를 하고 떠나버렸고 각자도생인 도서관에서 기댈만한 사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껏 진행한 프로그램에 대한 계획과 결과보고는 내부문서로 남아있지만 초짜인 저는 자세한 내용을 담당자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만 그럴 수 없었죠!ㅋㅋ)
이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의 성장 공식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해보고, 실수하고, 깨닫고!'
혼자서 '이렇게 잡아가면 되는 건가?', '이런 걸 사람들이 좋아할까?', '좋은 강사는 어떻게 알아보지?'와 같은 고민들을 하다가 결국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려면 다른 강연을 직접! 그리고 많이! 들어봐야 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후로 여러 기관의 행사나 강연을 부지런히 참석했습니다.
그쯤 참석한 강연 중 하나가 지금도 가끔 떠오릅니다. 안 좋은 기억으로요! ㅋㅋ 본론인 강연은 너무 좋았으나 서론인 강연 축하 인사에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섭섭함과 아쉬움?이 생각보다 오래갔고, 이 후로도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와 같은 내적 갈등과 자기 검열을 했던 에피소드입니다.
그날은 서울의 A대학교 강연장에서 '사람책'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사로 꽤 큰 규모였습니다. 저녁 7시에 시작하는 강연을 듣기 위해 백여명쯤 돼 보이는 사람들이 꽉 차게 앉아 있었습니다. 10분 정도 늦게 도착한 저는 빈자리를 찾아 조용히 착석했습니다. 때마침 강단 위에는 양복을 입은 5-60대 남성이 축하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사회자의 소개는 듣지 못했지만 그 남성이 하는 말을 미루어봤을 때 A대학교 관계자, 즉 총장과 같은 임원급 인사로 보였습니다.
크고 호탕한 목소리를 가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동시간대 다른 장소에서 수백 명이 참석하는 행사에 축하 연설 제안을 받았지만, 오늘 이 행사를 위해 가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제가 오늘 강연하는 사람책 B에 관심이 많습니다! 보통 이런 행사에 오면 30분 정도만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데 오늘은 끝까지 남아 있겠습니다. 하하하"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굳이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평소 상대를 배려해서 말하는 스타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사실이 아니라 금방 생각의 꼬리를 잘라버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섭섭함? 아쉬움? 속상함? 을 느낀 것은 그다음 말에서였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국밥집이 있는데, 거기 국밥도 너무 맛있지만 깍두기가 정말 기~막히게 맛있어요! 근데 그 국밥집 사장님이 연세가 적지 않아 언젠가 그 깍두기를 먹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그 국밥집 사장님을 사람책으로 모셔서 깍두기 비법을 후대에 전승시키면 좋겠어요! 요즘 젊은 여성들은 깍두기 맛있게 담글 줄 모르죠? 허허허”
제가 ‘젊은 여성’에 해당돼서 그런지 이 질문에 빈정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제가 남자였다면 아무 생각 없이 넘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여자’로 살면서 느꼈던 답답함이나 속상함이 내재되어 있어 그런지, 그 말이 제 어딘가에 탁 걸려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더군다나 이런 질문을 남녀 구분 없이 교육하는 대학교 강연장에서 듣게 될 거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여성으로 살았던 시대에 비하면 제가 살고 있는 현시대는 훨씬 합리적입니다. 엄마는 딸이라서 남자 형제에 밀려 배움의 한계가 있었지만 본인의 딸에게는 그런 한계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자가 더 많이 배워야 한다며 매번 대학 등록금을 꼬박꼬박 마련해 주셨습니다. 엄마를 비롯해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려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과 현 사회적 흐름에 감사히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지금도 지방에 사시는 어머니도 저한테 ‘여자가 김치 하나는 담글 줄 알아야지’라는 말은 한 적이 없으신데, 대도시에 살고 대학교 행사에 축하인사로 초대까지 받을 만큼의 고학력 인사께서는 왜 '요즘 젊은 여성들은 깍두기 맛있게 담글 줄 모르죠?'라고 물으셨을까요? (그 정도 맛있으면 본인이 배우는 방법도 있을 텐데요!!) 별거 아닌 질문일 수 있지만 저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가 힘들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의도는 제가 이해한 바와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어마 무시하게 맛있는 깍두기를 후대에도 전승하면 인류의 맛이 풍요로워질 것이기에 그저 남성, 여성 중 하나의 성만 언급한 건지 모릅니다. (국밥집 사장님을 '사람책'으로 만들어 위대한 맛을 계승시키자는 말은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런 자리에 초대받는 인사는 시대에 걸맞은 좋은 필터링과 자기 검열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지는’ 시대는 끝났고 집안일을 비롯해 육아도 남녀가 함께 하는 세상이니까요! 당시는 ‘결혼하면 내 커리어를 계속 쌓아가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야하지?’ 고민하던 시절이라그 말이 유난히 더 속상했던 모양입니다. 대학교 강연장에 모인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는 건 그의 무의식 속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적절치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요즘 학생들이 혼꾸녕을 내줬을 거 같은데요 ㅋㅋ) 위로 올라가는만큼 말의 품격도 올리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것 같아요! 높으신 분들을 위해 ‘말의 품격’ 검사 같은게 생기면 좋겠네요. 아무리 나쁜 의도가 없었다 해도 저처럼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충분히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하하하: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