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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Mar 22. 2022

내가 만난 사람들

05.





  어디까지나 우연에 관한 이야기다.



  J는 나의 대학 동기다. 2013년, 스무 살이 된 나는 1학년 C반 학생들이 전원 앉아 있는 강의실에 있었다. 거기 J는 없었다. 나와 다른 반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은 대체로 부정확한 편이니까. 굳이 이 글을 쓰기 전에 J에게 사실 확인을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건 내 기억에 의존하여 쓰는 글이니까. 이 부정확성을 고치고 싶지도 않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지를 짚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J도 이를 꽤나 좋아할 것이다. 아무튼 J는 나와 다른 반이기는 했다. 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지만, 그때 같은 조였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지는 않았다. 유난히 사교성 좋고, 쾌활한 친구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그 친구의 무리와 함께 어울렸다. 그 무리에도 J는 없었다. 내가 J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러니까, 축제가 한창이던 2013년 5월 무렵이나 되어서였다.


  내가 대학생 때 어울리던 친구들은 모두 외향적인 구석이 있었다. 축제 때 춤을 추는 무대에도 오르고, 주점에도 참여하며 과 행사에 꽤나 적극적으로 임하는 편이었다. 지금 그 친구들과는 모두 연락이 끊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친구들을 욕하려는 의도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더 이상 친구가 아니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정말 사소했던 것 같은데, 나의 성향과 그 친구들의 성향이 많이 달랐다는 사실이 되려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나머지는 전부 별거 아니었다. 적어도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다.


  아무튼 나는 그 친구들처럼 적극적이지는 못 했지만, 그런 친구들을 만나 덩달아 축제를 즐기긴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고지식하고 조용했던 내가 대학생이 되고는 고삐가 풀려버렸다. 그렇다고 감당 못할 짓까지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저 술을 많이 그리고 빨리 또 자주 마셨을 뿐이다. 


  별로 상기시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당시 나는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아마 나만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쌍방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유난히 많이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 꼭 누군가를 좋아하고만 싶었다. 그 선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내가 그 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정말 모든 사람에게 진심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초연하고 싶었지만, 나도 남들 다 한다는 그놈의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연애’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주눅 들어 있었기 때문에 나와 어울리던 친구들처럼 밝고 유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저 나와 그 친구들 간의 차이일 뿐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내가 이상하고, 재미없고, 매력적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렇기에 스스로가 더욱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뒤쪽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그 선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모르고 있지는 않겠지. 그래서 더 미웠고, 그런데도 또 좋았다. 그때, J가 등장했다. 


  J와 나는 인사만 나누던 사이었다. 함께 노는 무리도 전혀 달랐는데, 그만큼 무리의 성향 역시 정말 달랐다. 전혀 모르는 사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사이었는데, '조용한 친구들이구나'라고 생각했던 무리에 있던 J가 살갑지만 조용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처음 나눈 대화라 부를 수 있는 그 대화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큰 비밀을 공개하게 된다. 너도 저기 좋아하는 사람 있어? 너도? 우리 그럼 서로 좋아하는 사람 알려주자. 정확한 대화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이런 대화가 오고 갔던 것 같다. 우습게도 우리는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비밀을 토로하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그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대학교 신입생이어서 그랬는지, 축제로 들뜬 열기가 가라앉은 봄바람이 부는 5월의 자정 무렵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그 모든 것이 우연에 불과했던 것인지. 


  그때부터 J와 나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비밀로 관계를 트게 된 만큼 초반에는 주로 그 변변치 않은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이내 나도 J도 그 사람들의 실상을 깨닫게 되어 시들해졌고, 비슷한 시기에 내가 함께 다니던 친구들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되면서 J와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J의 친구들은 조용한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아니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저 인사나 할 따름이었던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언제가 되어 그때를 회상하더라도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말 그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같이 과제를 하고, 밤을 새우던 시간들. 학교 앞 카페에서 나란히 커피를 주문하고 걷던 얕은 오르막길과 가파른 계단. 파라솔 아래 컵라면과 봉구스 밥버거. 가끔의 짜증과 어쩔 때의 다툼. 졸업작품을 찍으며 먹던 떡볶이와 포토샵 픽셀을 바라보며 꿈뻑이던 뻑뻑한 눈. 우리가 공유했던 시간은 정말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것 그 자체였다. 그건 정말로 별거였다. 특별했다.


  그 추억의 다리의 시작점에 바로 J가 있다. 좁고 깊은 관계를 지향하는 나는 당시 어울릴 친구가 없었다. J는 내 상황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함께 다녀도 되냐는 내 말을 본인의 친구들에게 전해주었다. 흔쾌히 나를 반겨 주었던 친구들도 고맙지만, 이미 유대감이 있는 사이에 갑자기 끼어드는 나를 친구들에게 소개해줬던 J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튼튼한 다리를 내킬 때마다 건너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밀 같은 것은 치워진 지 오래인 우리 관계에서 나는 금방 깨달았다. J는 특별한 친구였다. 만약 내게 그런 시시한 비밀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J와 친구가 되지 못했더라면 내가 대학에서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비밀을 가끔은 귀하게 여겼다. 그런 인간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내게 J라는 우연을 안겨줬다는 것 때문에. J는 유일하고, 그런 행운은 그녀가 내 운명이었다고 해도 다시는 없을 테니까.

 

  나는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J의 태도가 좋았다. 이야기를 듣고 울고 웃는 J가, 화를 내고 놀라는 J가 좋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는 J가 좋았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태도,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좋았다. 나를 놀릴 때나 위로할 때나 똑같은 크기의 진심이라 좋았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가장 친한 친구라고 이야기해주는 J에게 나는 여러 번 감동하곤 했다. 감히 그 진심을 의심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짧은 여행을 하고, 가끔 서울숲을 걷고, 매번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카페에 갔지만 나는 어쩐지 피로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의심할 때마다, 내가 나를 못살게 굴 때마다 J는 운 적도 있고, 속상해한 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게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다려주었다. 내가 언제고 끝끝내 찾아냈던 삶에 대한 낙관성은 사실 나조차도 없다고 믿은 적이 많았다. 인생 될 대로 되라고 살면 안 되는 건지, 아무 의미도 찾기 어렵다고 말할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 내게 줄 대답을 고르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주곤 했다. 나는 내 말 같지 않은 말, 내 고민 같지 않은 고민도 늘 있는 그대로 봐주는 J가 좋았다. 그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줄 때, 나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적은 글을 볼 때 내가 감동했던 이유는 하나다. 그녀가 내게서 본 것, 나는 정말로 내 안에 그것이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로 나를 걱정했다. 나의 식습관과 나의 수면 패턴, 내 음주와 흡연을 걱정했다. 내가 대책 없이 사람을 따르고, 작은 친절에도 과하게 감동하는 태도를 걱정했다. 그녀가 특히 걱정했던 것은 나의 끊긴 필름이었다. 유난히 술을 많이 마시던 대학생 때, 나는 자주 기억을 잃곤 했다. 눈을 뜨면 자주 어떤 남자와 손을 잡고, 그 사람 어깨에 기대 있었다. 학교 선배였던 적도 있고, 복학생 오빠였던 적도 있고, 동기, 실습 갔던 스튜디오의 엔지니어 님 ···. 진짜 많기도 많았다. 물론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건 ‘물론’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붙을 만한 일은 아니긴 했다. 그건 차라리 기적에 가까웠다. J는 그 이상의 일을 늘 내게 경고했다. 그러나 끝까지 나를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할 따름이었다. 기적은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항상 바랄 수 없는 거니까. 


  나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만약 그녀가 나를 비난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 헤프게 굴고, 흘리고 다니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 비난을 당연히  여겼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지우고 나만, 오로지 나만 그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빙글빙글 돌며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 덕분이라는 말은 거짓말이겠지만, 대학생활을 졸졸 따라다니던 그녀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나를 보호해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그런 일련의 사건으로 정의될 수도 없었겠지만, 적어도 이것보다는 나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녀에게도 그렇고, 스스로에게도 그랬다.  



  우리는 닮은 점이 많았다. 우리는 똑같은 모자와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파리바게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졸업해서는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 같이 제품을 공부하고, 같이 회사를 욕하고 같이 일을 즐겼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달랐지만, 같은 것을 추구했다. 우리는 휴식을, 조용한 삶을 원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소란함을 사랑했고, 우리의 큰 꿈 우리의 작은 소원 모든 거대함과 사소함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같은 것에 분노하고, 같은 것에 감동하고, 같은 것에 웃거나 지루해한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우리의 시작이 우연에 불가했다는 것을 때로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다. 이 모든 것이 우연에 관한 이야기 었다니.     



나는 언제고 J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뜬금없이, 별안간, 내가 그녀에게 서운했던 어떤 순간까지도. 친구를 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우스운 말이지만 그럼에도 J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가장 초라했던 순간에, 내가 가장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던 순간에 J는 언제나 필연처럼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우리가 하고 있거나 하지 않고 있는 어떤 것만이 우리를 정의 내릴 수는 없다고.  


    

나 역시 그녀에게 필연이고 싶었다. 그녀가 내게서 나를 봤던 것처럼 그녀에게서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고 너는 내가 만난 가장 필연 같은 우연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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