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 그룹의 신임 팀장 온보딩 SBL(scenario-based-learning) 개발을 위해 썼으나, 사용되지 못한 비운의 시나리오를 풉니다.
우리 팀에도 빌런은 있다. 바로 ‘불화막시무스’다. 매번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말을 하고, 우리 팀의 방향을 꾸준히 의심하고, 다른 팀원들의 피드백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업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퍼포먼스도 나름 잘 내는 편이라 본인에게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정말이지 번지점프, 스카이다이빙 이런 건 무서운 일도 아니다. 합리적인 논리를 세워 이런 빌런을 재지하고, 타 팀원과의 갈등을 중재하는 게 진정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 외에도 팀원 누구에게나 이상한 부분은 조금씩 있다. 요구사항을 애매하게 작성해놓고 뒤늦게 변경을 해야한다고 이야기하거나, 의미없는 문서를 작성해놓고 영양가 없는 회의를 하자고 하거나, 실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두고 완벽함을 추구해 주위를 지치게 하거나, PM의 권한을 침범해 프로젝트 진행을 지연시켜놓고선 책임을 회피하거나, 다른 팀원들이 해둔 일을 무시하고 무조건 자신이 처음부터 다시 해야 직성이 풀린다거나, 모든 의견을 수용해서 쓸데없이 일을 키운다거나, 프로젝트 진척을 더디게 해 팀원들의 집중력이 떨어지게 한다거나, 주위의 시간을 뺏고 정치를 한다거나...
얼마 전 실시한 다면평가 결과가 나왔다. 우리 팀에서 제일 좋은 점수를 받은 팀원 조차 표정이 어둡다. 팀장이 되면 누구에게나 기대 이하의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그냥 평가 결과가 싫은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다들 숨만 쉬고 있는데 티가 난다. 물론 내 결과도 나왔다. 초임 팀장으로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내 결과도 기대 이하이다. 우리 팀원들에게 섭섭하기도 하고, 다들 나에게 무슨 등급을 주었는지 머리 위로 뿅하고 뜨는 기능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좋게 잘 말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나에게 피드백을 주기보다는 다들 조용히 멀어지는 편을 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오르막에 오를 생각은 하지 않았고, 구멍에만 빠지지 말자고 생각했었다. 그럼 적어도 평지에 있는 거니까.. 그렇게 기대가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평가결과를 보니 나에게도 번아웃의 파도가 밀려온다.
복도에서 만난 D팀장이 슬쩍 우리 팀 A선임이 전배를 고민하더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A선임이야말로 내가 의지하고 있었던지라 충격이었다. 새로운 포지션에 적응하느라 앞만 보고 달린 나만 몰랐지, 다들 은근히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역시 소외된 줄도 몰랐을 때가 진정한 소외다. 배신감도 잠시. 빌런과는 불편해서 안 싸우고, 만만한 사람에게만 짐을 지우면 좋은 사람은 모두 떠나고 빌런만 남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D팀장이 위로의 말을 해주는데, 그게 더 부끄러웠다. 이제라도 팀원 간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하나 싶은데, 정색 특급열차를 탈 얼굴들이 눈에 선해 머리가 아프다. 역시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불행이 초근접거리에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