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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기

의미 없는 타인이 의미를 가지게 될 때

by 김다혜
505007_608362_1844.png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컷, 군중 속의 고독을 잘 보여주는 복도식 아파트


진아는 콜센터에서 근무하며 혼자 산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삶을 살지만, 그들은 진아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타인일 뿐이다. "일하면서 왜 감정 섞고, 진심 섞어?"라고 묻는 팀장은 진아의 냉소를 강화하고, 스스로 방어막을 세우게 만드는 사람이다. 심지어 갑자기 나타난 아빠마저도 죽은 엄마의 재산을 가로채며 진아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 여편네", "니 엄마" 같은 단어로 진아의 상처를 헤집으며, 엄마의 마지막 흔적인 휴대폰 번호마저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 버린다.


진아는 로봇처럼 콜센터의 전화를 받는다. 심지어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장례식이 진행되는 이틀만 결근하고 바로 출근한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 달에 그녀는 콜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된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속 시원히 화를 내지 못하는 진아는, 삶이 구차하다 해도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아 삶을 직면하지 못한다. 성냥으로 담배 불을 붙이면 더 잘 탄다고 말을 걸어오는 옆집 남자를 진아는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렇게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그렇게 희미해져 간다. 진아도 함께 희미해진다. 체념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런 삶 속에서도 진아는 질문하지 않는다. 타임 머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고객에게도, 대뜸 욕을 퍼붓는 고객에게도 그저 대답만 할 뿐이다. 상처받지 않으려 관계에서 멀어지고, 세상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질문은 필연적으로 진심을 내포하고 있고, 이는 존재를 취약하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진아는 이런 삶이 힘겹지만, 더 나은 대안을 떠올리지 않는다. "행복의 이데올로기를 믿는 행복한 사람들(최승자, 『기억의 집』, 1989, 「주변인의 초상」)"을 부러워하면서도 증오하며, 그 속으로 들어가기를 무심코 갈망하지만 "서울의 탱탱한 표면 장력"으로부터 밀려났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진아의 삶에도 균열을 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누추함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신입사원 수진의 등장이다. 수진은 "제가 왜 죄송하다고 해야 해요?"라고 물으며 진아를 응시한다. 수진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불합리한 진아의 삶에 돌을 던진다. 수진이 회사를 그만둔 뒤, 진아는 수진의 말처럼 헤드셋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을 느낀다. 혼자 있는 게 편하다며 유튜브를 듣던 진아의 점심시간, 커튼을 꼼꼼히 친 어두운 방에도 실금이 가기 시작한다.


의미 없는 타인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은 무엇일까? 진아에게 의미 있는 타인은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팀장도, 심지어 아빠도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이사 온 옆집 남자와 수진이 그녀에게 의미 있는 타인으로 자리 잡는다. 그들은 진아가 오랫동안 겪어온 감정적 번아웃, 즉 냉소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옆집 남자는 진아의 닫힌 세계를 열어주고, 그녀가 잊고 있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의미 있는 타인은 때로 우리가 스스로 떨쳐내지 못했던 무의미한 타인을 걷어낼 힘을 준다. 진아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내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이는 그녀가 억눌러왔던 감정들을 자각하고, 자신을 짓눌렀던 과거와 단절을 선언하는 순간이다.


군중 속에서 자신을 잃고 무감각해지는 편안함 속에 갇혀 있던 진아는 이제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해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다정히 말을 걸어준다면, 그 한마디는 인생을 조금씩 굴러가게 만든다. 그녀는 더 이상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돌려보며 스스로를 옥죄지 않을 것이다. 혼자 먹는 게 편하다며 외로움을 회피하지도 않을 것이다. 좋은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하거나 희망적인 미래만을 약속하지 않는다. 진아는 내일도, 모레도 여전히 콜센터에 출근해 고객의 카드 내역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역할에 매몰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은 진아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의미 있는 타인이란 누구이며, 그들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진아의 여정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암시한다.



* 이 글은 '서교 아일라'의 커뮤니티 모임 '시네마 테라피'를 준비하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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