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자유보다, 틀리지 않을 자유가 더 중요해졌다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지금은,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의심받는 시대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다양성을 말할수록, 우리는 더 조심스러워진다.
어떤 말을 꺼낼까 두렵고, 어떤 표현이 불쾌하게 느껴질지 몰라 눈치를 본다.
심지어 질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건 물어보는 것 자체가 차별입니다.”라는 말이 정답처럼 소비된다.
‘다양성’이 신념이 아닌, 무기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말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틀리지 않을 권리가 더 우선된다.
비난받지 않을 권리. 공격당하지 않을 권리.
이 권리를 침해하면, 그 즉시 ‘가해자’가 되고, ‘혐오 세력’으로 규정된다.
표현은 점점 더 정서적 허가제가 되어간다.
말의 의미보다 감정의 해석이 앞선다.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누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중심이 된다.
결과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다름'이 아니라 '위협'으로 간주된다.
다양성은 원래 공존의 철학이다.
서로 다른 의견, 다른 정체성, 다른 시각이 충돌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지금의 다양성 담론은, 절대적 정답을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다양성이 말의 경계를 넓히기는커녕,
오히려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게 만든다.
‘말하면 공격받고, 침묵하면 안전한’ 시대.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검열의 공론장’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상처받지 않을 권리도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윤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어떤 불편함은 토론의 시작점이지, 억압의 근거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불쾌함과 혐오 사이의 선을 구분할 지혜다.
지금 우리는, 진짜 다양성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해진 다양성의 틀 안에서만 다양함을 허락하는 것은 아닐까?
표현의 자유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해야 진짜다.
그래야 우리가 말하는 ‘다양성’이,
진짜 다채로운 세상을 가능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