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後愛
2019.03.16 토요일
아이가 10개월 때 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 후, 늘 해야 할 일의 절반밖에 못하고 살고, '시간이 없어서'가 입버릇이던 타임 푸어 워킹맘 생활 만 5년을 꽉 채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무직' 상태로 돌아가는 D-day 7일입니다.
책 소개 문구처럼 포장해보자면, '잘 나가던 (?) 외국계 회사 마케팅 차장'직을 내려놓고 대학 졸업 후 만 12년 만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무소속', '잉여', '백수' 신분입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5년이었습니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후하게 줘도 늘 한 70점짜리 정도 되는 것 같아 찜찜한 날들이 많았지만, 70+70=140의 에너지를 내며 (혹은 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10개월 아이를 두고 출근을 하던 초기는 늘 퇴근길에 뛰었습니다. 꼭 필요한 저녁 자리, 회식자리가 아니면 참석하지 않았고, 저녁 자리에서도 1차에서 마무리하거나, 1차 중에 일어나기 일쑤였습니다.
아이가 7살이 된 지금은 여유가 조금 생겼다지만, 처음 1년간은 회사에서 먹는 점심 한 끼가 여유롭게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식사였습니다. 일도 잘하고 싶었지만 아이와의 애착 역시 너무 소중했기에 매일 최소 3시간은 같이 뒹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녁을 먹는 것도 잊고 지쳐 잠든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와 애착은 아주 끈끈하게 잘 형성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청소와 빨래 등의 순위를 높이지 못해 '내가 너 빨래해주려고 결혼했냐'는 핀잔 속에 남편과의 관계는 멀어졌을지라도 말입니다 (진지).
그렇게 지내던 워킹맘 2년 차 즈음 인가엔 몸무게가 성인이 된 이래 최저 몸무게인 44kg을 찍었고, 어지럽기 일쑤였습니다. 허겁지겁 무언가를 먹어야만 몸에 겨우 에너지가 공급되는 느낌을 알게 되고, 이상한 자가면역질환으로 병원 신세도 졌지요.
3개월간의 약 복용 이후, 운동도 하고, 아이도 조금 커가면서 여유가 조금 생기는 듯 하자 이후는 회사 꼰대들과의 씨름에 지쳐갔습니다. 수컷들의 영역 다툼을 목격하며, 배려 뒤에 숨은 진심을 알게 되며, 필요에 의해 가늘고 가늘게 이어졌다 끊어지는 정치적 제휴 관계를 배워가며, 존버 신공 (*'존나 버티기'라고 꼰대 2번이 말해줌)가 최대치에 다다른 꼰대들의 갑질에 시달려가며 하루하루 지쳐갔습니다.
회사에서의 동기 상실, 사람에의 혐오, 방치된 집안일에 대한 스트레스, 나의 월급은 필요하지만 방치된 집안일은 혐오하는 남편이 주는 압박까지.
어느 날인가 집 앞 차에서 통화하던 한 친구가, 스트레스받는다며 한숨을 쉬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괜찮다 괜찮다 잘만 말해주면서, 본인에게는 왜 그렇게 가혹해? 다 잘하려고, 다 완벽하려고 하지 마, 좀 내려놓아도 괜찮아.'
태연한 척 전화를 마무리하고, 차 안에서 누가 보면 안 될 오만상을 한 채 추하게 엉엉 울며 깨달았습니다. (드라마처럼 운전대를 부여잡으며..)'아, 그간 내가 힘들었구나. 내가 생각보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었구나'를 온몸으로 말입니다. (그 와중에 지나가던 사람이 차 안을 볼까 조심한 건 안 비밀..)
'나에게 좀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 같은 문구를 책에서 읽어도 머리로만 끄덕거리던 그 이야기가, 내 주변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들려주니, 소위 '훅' 하고 들어온 거죠.
그간 두 가지 '감'으로 12년을 버텨온 것 같습니다.
1. 불안감 -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 되지 않으면 안 돼. 다른 갈 곳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만두었다가 이직이 어려우면 어떻게 해. 이대로 그만두고 경단녀가 되면 어쩌지. 세상은 빨리 바뀌는데 뒤쳐질 것 같아
2. 책임감 - 결혼 자금 조금은 내가 마련해야지. 나도 일 해서 살림에 보태야지. 아이와 일 모두 잘 해내야지. 그래도 내가 한다고 했는데 끝까지 해내야지......
그래서 이제 그만 퇴사합니다.
그리고 대단한 일들로 일상을 채우지 않겠지만, 그리고 대단한 변화가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소소하게 제가 좋아하는 일들로 하루하루 보내면, 그렇게 하면 일상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한번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간 가불해 쓰고 대출해 쓴 저의 에너지를 이제 조금씩 채워보려고 합니다. 밀려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40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7살 유치원 입학 이래 처음으로 소속 없이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사회에서 잊힐까 불안해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도 체험해보면서, 책 읽고, 산책하고, 운동하고, 삶의 쉼표를 찍는 시간을 준비하느라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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