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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온한 삶 May 09. 2021

우리 형편에

1-1


가족들과 오랜만에 육개장을 먹었다.

집 앞에 육개장으로 유명한 집이 있어 그쪽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엄마, 아빠, 나 그렇게 셋이하는 식사는 오랜만이다. 동생은 미국에 간지 오래라 전화로 어버이날을 축하했을 것이다. 아빠가 육개장이 맛있다며, 메뉴를 잘 정했다한다. 메뉴를 잘 정한 건지 만원 대비 가성비가 좋아 그렇게 얘기한 건지 구분은 안 가지만, 어쨌든 잘 드시니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아무 얘기가 없다. 묵묵히 육개장을 먹다가 한마디를 건넨다.

“ 더 공부를 해야 하겠니?”

엄마의 한마디는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안다. 우리 엄만 참다 참다 한마디 하곤 하는 인내심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말릴 수 없을 것이다. 내 차례였던 유학을 동생이 먼저 가버렸고, 나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가장의 책임을 20년 하다가 이제 다시 공부를 하겠다 하는, 부양 책임을 한 번도 회피한 적 없는 딸이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내미는 교수가 되었지만, 공부하느라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이제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며 또 얼굴 보기가 어려워질 큰 딸을 앞에 두고 엄마, 아빠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과 20년 넘게 떨어져 지내고, 딸마저 공부를 더 하다가 혹시 외국으로 가는 것 아닌가 모르는 불안감에서였을까? 엄마는 말을 아꼈다.


육개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 아빠는

“ 너 뜻대로 해라. 우리는 네가 원하면 뭐든지 좋다”

라고 한다. 20년 전에 동생이 미국에서 정착한다고 했을 때에도 들었던 똑같은 말. 저렇게 말을 하고는 끝이었다. 덕분에 동생은 발걸음이 가볍게 떠났다.


우리 부모님은 순하다.

큰소리 한번 안 내고 나와 동생을 키웠다.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았으나, 그릇에 맞게 살며, 만족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우리 형편에'라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 얘기를 꺼낼 때 부모님의 눈은 항상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미술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 유학을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우리 형편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떠난 동생이 원망스러운 날이 많았다. 나는 결심도 못한 유학을 동생은 너무 쉽게 결정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년 넘게 가장 역할을 하다 보니 우리 형편에라는 말이 항상 나를 일으켜주었다. 주먹을 쥐게 했고, 목표를 정하도록 이끌었다.


일어날 때가 되었다.

엄마는 딸에게 한마디를 더하려다 말았다.

"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형편이란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

난 한마디를 더했다.
엄마는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인다. 딸이 고생하는 게 싫은 기색이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가게 앞에서도 쉽게 헤어지지를 못하는 우리.

“ 건강 조심하고”

“ 엄마, 아빠나 특히 조심하세요”

부모님이 뒤돌아가신다.

오늘따라 뒷모습이 헛헛해 보인다.

동생이 떠난단 얘기를 듣고 돌아선 20년 전 어느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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