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뱃살
‘독일은 냉장고에 맥주 없으면 beer police 출동해서 잡아가는 거 알지?’
누군가는 유럽에 산다는 게 꽤나 우아하고 낭만적인 삶이라 생각하겠지만, 이곳의 일상은 매일 챌린지의 연속이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일상은 '사소하고 자잘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놓쳐서는 안 되는' 류의 일들이 얼마나 많던가. 학교는 무슨 행사가 그렇게나 많은지 학교 행사 잊지 않고 챙기랴, 로켓 배송도 없는데 어디서 파는지도 모를 준비물들 번역기 돌려가며 공수해서 보내랴, 아플 기미만 보이면 학교에선 당장 데려가라고 전화가 오고 돌아서면 또 돌아오는 친구들 생일파티 선물 준비와 픽 드롭, 그 사이사이 원활한 학교 적응을 위한 플레이 데이트, 초대받고 초대하고 그 일련의 일들.
영어라도 잘했으면 조금은 수월했을까. 이 모든 것들을 독어는 1도 모르고 영어도 울렁증이 있는 내가, 노는 것도 연일은 버겁고 사람 부대끼는 일은 최소한만 하려는 INFP 극 내향인인 내가 하고 있자니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정말이지 하루하루 에너지가 너무도 소진되는 것이었다.
이국 땅에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뾰족해진 남편, 낯선 언어와 환경에서 부대끼느라 짜증이 늘어난 아이. 그 사이에서 ’그래도 나보단 두 사람이 더 힘들겠지’하는 마음에 내 마음 따위 힘든 건 내색도 못하고,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최소한의 역할은 해내려 애쓰다 보니 가뜩이나 두부 같은 내 멘탈은 계속 내상을 입고 있었다.
세상에는 모든 일을 척척해내는 슈퍼우먼 같은 엄마도 많지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기도 두려운 나 같이 겁 많은 엄마도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아이의 마음고생은 다 나의 부족함 때문인 것 같았고 이런 내 심경을 남편에게 토로라도 할라치면 괜히 나까지 부담이 될까 말도 못 하고 그냥 한없이 쭈구리가 되어가는 날들이었다.
이런 하루하루 속에서 너덜너덜해진 내 멘탈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던 것은 모두가 잠든 밤 혼자 앉아 마시는 맥주 한 캔과 넷플릭스.
더욱이 이곳은 ‘맥주가 물보다 싸다’는 맥주의 나라 독일이 아니던가. 캔 맥주는 가격이 더욱 저렴해 하나에 1유로 언저리였고 죄책감 없이 종류별로 냉장고 그득그득 쟁여두었다가 기분 따라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예상했듯이 독일인들은 맥주를 물처럼 마셨다. 냉장고에 맥주가 없으면 beer police가 출동한다는 독일인의 농담처럼 혈중 알코올 농도가 0인 상태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도 처음에는 맥주값이 저렴하단 핑계로 멋모르고 식사 때마다 물 대신 맥주를 마셨다가 하루 온종일 알딸딸한 상태로 보내게 되는 날이 여러 날이었다.
여하튼 이렇게 쟁여놓은 시원한 맥주를 한 캔 따고 요즘 한국에서 핫하다는 K-drama를 틀어 소파에 기대앉으면 파란 눈의 사람들과 낯선 말들 속에서 종일 지친 내 심신이 익숙한 얼굴과 말들 속에서 마침내 편안히 숨을 쉬었다.
첫 모금에 켜켜이 쌓였던 자괴감을 씻어내고 두 모금에 그래도 이 정도면 잘하고 있어 괜찮아 위로하면서 한 캔을 다 비울 때쯤이면 내일은 좀 더 나은 하루를 보내야지 다짐하게 되는 쌉쌀하고 시원하고 고마운 어른의 음료.
두 캔은 안된다. 내일 아침 더 자괴감이 드니까.
그렇게 나는 매일 밤 맥주와 넷플릭스와 함께였고 내 배와 허리에 남은 이것은 뱃살이 아니라 일 년 치의 내 한숨과 외로움이라고 한다면 늘어난 5kg에 대한 변명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