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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현 May 15. 2024

미물의 무게

넣어둔 글을 오랜만에 꺼내 완성한다. 


2023년 8월 4일, 오서방으로 부르던 블루구라미가 죽었다. 2020년 12월 처음 만난 후 975일만에 떠났다. 탁해지지 않고 맑은 눈은 여전히 어딘가를 바라보는데, 절대 눕지 않던 녀석이 소일 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혹시나 기운이 없는걸까 수 분을 들여다 봤지만 아가미가 움직이지 않았다. 레인보우와 블랙루비 바브들이 밥을 주나 싶어 내 앞을 서성였다. 갑자기 댐 수문 연 마냥 눈물이 펑펑 흘렀다. 블루구라미의 수명은 5년, 내게 왔을 때는 청소년. 오서방은 올해 들어 부쩍 나이든 티가 났다. 생먹이와 각종 사료를 솔찬히 먹였지만 끝이 상한 지느러미가 그다지 돌아오지 않았고, 대체로 뒷편 자기만의 자리에 있었다. 그 전까진 먹성이 좋고 호전적인 성격이어서 사료를 주면 첨벙 소리 내면서까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경쟁하고, 이유도 없이 주변 이웃들을 괴롭히고 쥐어팼다. 호기심도 많아서 무언가를 새로 넣으면 기조로 더듬거리곤 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눈이 마주치면 느릿느릿 움직이다 제자리로 가기만 했다. 오서방의 죽음에 하루종일 울어서 밤엔 두통이 심해 잠자기 쉽지 않았다. 눈물이 끊임없이 났다.


블루구라미 오서방과 지난해 병으로 죽은 삼봉이는 지난 4년간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 둘은 사실 업체 측에서 잘못 보내온 아이들이었다. 나는 개량종인 오팔/마블 구라미를 원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 원종인 블루구라미였다. 예상치 못하게 원종을 받아버렸는데 하필 성격이 난폭한 종이라 당시 구라미항을 운영하며 정말 고생을 했다. 둘이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지느러미에 낫지 않는 흉터가 생기기도 했고 놀라 도망가던 구라미가 점프사로 죽기도 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수조를 추가했고 둘을 분리했다. 그러자 그럭저럭 평화가 찾아왔다. 오서방은 손톱만한 바브 유어들을 잘 대해줬지만, 그들이 자라서 휭휭 돌아다니자 쥐잡듯 잡기 시작했다. 또 그렇게 수조를 추가했다. 다시 둘을 합사했다. 둘의 싸움이 너무 심해 아예 과밀을 결심하고 골든구라미 둘인 금철과 금숙을 추가했는데 나중에 성장하고 보니 금숙이 혼자 홍일점이라 지옥이 펼쳐졌다. 금숙이를 차지하려 세마리가 전쟁이었고 덩치가 이들보다는 작은 금숙이는 숨어 있거나 수조 구석에 찌그러져 있곤 했다. 


격리항에서 회복하던 시절 삼봉이의 모습. 그는 가끔 본어항을 바라보곤 했다. 


삼봉이는 2022년 8월에 죽었다. 테트라히메나에 걸렸다. 우연히 온몸에 얼룩덜룩한 무언가가 보여 건져보니 건강한 모습이 아니었다. 혼자서 일주일쯤 이래저래 처치해 보다가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수산질병관리원 '물고기병원'까지 갔다. 15cm는 넘지만 이미 컨디션이 너무 나빴기 때문에 바닥재를 떠 가서 검사했다. 테트라히메나라는 병이었다. 수조 내 유기물이 많을 때 이를 분해하기 위해 나타나는 원생동물인 테트라히메나가 삼봉이의 외피에 감염됐다. 삼봉이는 회복하는 하더니 성급하게 수조에 돌려보낸 잘못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래 살길 바라며, 비정상회담에서 장위안이 말했던 '300년 산 짱쌈뿅(張三峰)' 이름을 따서 삼봉이라 불렀는데 오래 살지 못했다. 


삼봉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항을 집어삼켰던 금서방도 떠났다. 오서방과 싸워 이기던 그는 허무하게도 점프사로 말라 죽었다. 허무한 두 번의 죽음. 나는 이때 아마도 '어쩔 수 없었다'라며 내 감정을 회피했는지 모른다. 



오서방이 떠나기 세 달 전 모습.



오서방이 떠나고 한동안 병원을 다녔다. 2020년 만난 후 4년여 만에 떠난 그가 너무 안타깝고 그리워서 시도때도 없이 울었다. 날 고생시킨 기억뿐인데, 삼봉이와 금서방의 죽음까지 뒤늦게 밀려와 나를 힘들게 했다. 죽은 그날은 때마침 수면장애로 다니던 병원에 가는 날이기에, 간 김에 오서방의 죽음과 나의 슬픔을 말했다. 펫로스 증후군을 이야기 하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아, 내가 고작 손바닥 보다 작은 물고기에게 느낀 이 깊고 어이없는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구구절절 왜 내가 물고기의 죽음에 펫로스 증후군을 느끼며 우울한지, 어째서 힘들어하는지 설명했다. 의사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했고, 내게 장례 등 정성껏 의식을 치러준다면 펫로스 증후군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해줬다. 나는 우울증 약을 조금 받아 집으로 와서는 죽은 오서방을 사료 몇 알과 함께 내가 가진 조금 큰 화분에 묻었다.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나 나약해서, 왜 원초적 고독을 갖고 있어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야 마는 걸까? 나를 고생시킨 기억에 사랑을 담지 말고 짜증만 담았다면 어땠을까? 벌써 떠난지 일 년여가 다가오는 2024년 5월, 쓰다 만 글을 이어 가는 데 또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왜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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