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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현 Sep 17. 2020

청소 물고기의 역할

갈색이끼 특공대 안시?

안시가 나나 잎사귀 뒤에 붙어 있다.


퇴근 후 사료를 어항에 뿌리면 파티가 열린다. 사료가 아니라 냉짱(냉동 장구벌레)이나 브라인 쉬림프를 주는 날이면 신나서 첨벙대고 수면에 대고 쪽쪽 뽀뽀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사료를 입에 물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그래서 나도 신나서 사료를 주다가... 쏟았다. 순식간에 어항 전체에 퍼지며 먼지처럼 흩날리는 사료를 보는데 아...... 이게 바로 인생무상이구나 했다. 맑은 물, 아름다운 초록색의 수초... 다음 날부터 내 어항은 엉망진창 갈색 이끼에 뒤덮였다.


유목의 슬러지는 안시의 맛있는 먹이



어항에 찾아오는 불청객은 많다. 또아리물달팽이나 납작달팽이, 물지렁이, 플라나리아 같은 생물체부터 백탁, 녹점 이끼, 시아노 박테리아, 갈색 이끼, 슬러지 같은 '미관참시(어항 풍경을 망치는 것)'의 범인들도 있다. 포기하고 방치할 수도 있지만 보기도 싫은 데다 정성껏 키운 수초도 망가지고 물고기에도 좋은 영향은 안 끼치니 얼른 정리해야 한다. 물생활에 선입견을 갖는 사람들이 어항 청소 힘들지 않냐며 묻는 이유의 99%는 이것들 때문이다. 그래서 초보자가 수족관에 가면 사장은 으레 '청소 물고기'도 하나 들여가라고 한다.

갈색 이끼가 창궐하고 며칠 후 조그마한 안시 숏핀 둘과 가오리 비파라고 불리는 타이거 힐스트림 로찌 둘을 데려왔다. 부분 환수도 하고 조명 시간도 늘였지만 별 효과가 없다는 핑계로 이끼 잘 먹는다는 넷을 데려왔다. 어항에 들이고 다음 날 보니 조그마한 수초 잎 하나와 온도계 옆에 2cm 지름으로 멍처럼 꼈던 갈색 이끼만 사라져 있었다. 넷이서 먹는 속도보다 갈색 이끼 끼는 속도가 더 빠를 게 보였다. 결국 나는 어항 속 구조물을 전부 꺼내서 죄다 칫솔로 박박 닦는 무식한 방법으로 갈색 이끼를 박멸 했다. 안시와 가오리 비파는 귀여우니까 됐다.

누가 처음 '청소 물고기'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물생활을 갓 시작한 사람들의 블로그를 보면 꼭 청소 물고기들이 있다. 안시, 플레코, 비파, 코리 이런 친구들이다. 다들 벽이나 바닥에 붙어 냠냠 거리는 친구들이다. 정말 청소를 잘 할까? 그렇지 않다.  이 청소 물고기군(群)은 잡식이면서 동시에 칡잎, 이끼 같은 식물성 먹이를 좋아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탓에 어항 벽에 생기는 얕은 이끼를 찾아 먹기는 하는데, 어항의 미관에 영향을 줄 만큼 영향을 주진 못 한다. 다만 사람들이 이 친구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청소 물고기 역일 뿐이다.  

안시는 안시 나름대로 약간 멀뚱한 얼굴이 귀엽고 비파는 스티커 붙은 듯 벽에 붙은 모습이 신기하다. 코리도 물살을 타고 놀다 사람을 보면 놀라 후다닥 도망가는 것을 보면 어린애를 보는 듯 개구지다.

청소 물고기라는 말을 접할 때면 불쾌한 기분이 든다. 유난히 화려한 색깔에 지느러미를 너울대며 어항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다른 열대어들과 다르다고, 멍청한 초심자 속여 먹기 딱 좋다 생각한 어떤 심술궂은 수족관 주인의 계산 속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다. 청소 물고기라니 쉽게 느껴지지만 사육 난이도가 결코 낮은 것도 아닌데 이 친구들의 개성은 아랑곳 않고 '어항 청소 귀찮으시잖아요. 청소 물고기도 데려가세요' 하는 속셈이 싫다. 그렇게 어느 집으로 가서 억지 역할 부여 받고 견디다 죽을 물고기들을 생각하면 괘씸하다.


'가오리 비파' 타이거 힐스트림 로찌와 아기 애플이. 둘다 '청소부'로 유명한 친구들이다. 불행 중 다행은 가오리 비파는 마니아 사이에서 인기가 있어 순식간에 팔려나간다나?


굳이 사람 사는 이야길 끌어올 필요는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나도 청소 물고기의 역할을 누군가에게 억지로 받아 살면서도 몰랐던 기억이 난다. 여자로, 딸로, 연인으로, 젊은이로 응당 해야 할 일이 아니냐며 정작 나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역할을 받았던 기억이 줄줄이 지나간다. 끝에는 다시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랬던 기억이 따라온다. 연인이잖아, 부모잖아, 나이가 어리거나 많잖아 하면서 했던 숱한 실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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