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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한손수레 Jan 26. 2024

이삭도 세트가 있었어.


"여보, 나 지금 마쳐서 집 가는 길인데 오늘 언제 와?"

"7시쯤? 왜?"

"아직 2시간 좀 덜 남았네. 나 점심 못 먹어서. 배가 너무 고픈데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있을까 싶어서."

"집 가는 길에 이삭 있잖아."

"아냐, 이번달 생활비 너무 많이 썼어. 진짜."

"내가 나중에 가서 줄 테니까 먹어."

"아냐, 괜찮아. 진짜 좀 아껴야 돼."

"내 용돈으로 준다니까. 그냥 먹어. 제일 비싼 거 먹어."


이런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이 사람에게 참 미안해진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결국 또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이삭 키오스크 앞이다.


'이삭에도 세트가 있네. '


배가 고파서일까 세트가 먹고 싶었다.

양심은 있는 건지 세트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좀 저렴한 토스트가 마침 먹고 싶어 주문했다.


홀로 텅 빈 매장에 앉아 기다리는 데 문득 기름 뒤집어쓰며 일하고 있을 남편이 떠올랐다.


언젠가 티비에서 국민 멘토라는 김미경강사가 마흔의 남자들에 대해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우리 남자들이요. 진짜 참 불쌍해요. 맨날 일찍부터 일어나서 출근하죠. 회사에서 치이고 집에 오면 아이들도 엄마밖에 몰라. 그렇게 죽어라 일해서 월급 받으면 다 어디로 가? 마누라손에 들어가. 그러고 지가 몇백을 벌어오면 뭐 해, 용돈 받아쓰잖아. 그것도 얼마나 써? 삼십쓴다고. 짠해죽겄어, 아주. 남편한테 뭐라 하지 마요."


아주 쏙쏙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였다.

남편은 김미경강사가 말한 보편적인 상황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니 괜히 머쓱하게 웃고 넘겼었다.


힘들게 일하고 퇴근하는 남편은 아이들의 저녁담당이다. 여기서 저녁은 '밥'이 아닌 '시간'이다.

집으로 귀가한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재운다.

숙제도 틈틈이 확인해 주고.


10시. 집에 들어가 보면 이미 아이들은 기절해 있다.

남편은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다. 작은 반짝이는 걸 손에 들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저녁은?"

"못 먹었지."

우리의 생사확인방법이다.


매번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하는 나 때문에 늦은 시간, 남편은 라면을 끓이거나 김치치개를 끓인다. 그도 아니면 자신의 용돈을 꺼내놓고 배달앱을 켠다.


어젯밤 홀로 맥주를 홀짝이던 그의 모습이 떠오를 때쯤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콘치즈토스트 나왔어요."


쟁반을 들고 와 앉아 한입 베어무는 데 달달하니 너무 맛있다.

입이 헐어있어 아픈 통증맛까지 나니까 더 남편 생각이 났다.


이렇게 달달한 사람인데 함께 느껴지는 통증처럼 나는 남편에게 오히려 아픔일까 순간 멈칫했다. 이 사람도 당신과 같은, 사랑과 애교가 넘치는 (본인이 늘 희망했던) 달달한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내가 그의 행복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조금씩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딴생각이라도 해야겠다고 천천히 원기둥처럼 생긴 낯선 감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좀... 느끼한데...'


콜라를 꿀꺽꿀꺽 삼켰다.

그제야, 시원하게 속이 내려갔다.


톡 터지는 콜라에 혀도 목도 따끔따끔했다.

하지만 기분 좋게 날 진정시켰다.


그래. 단 걸 단거랑 먹으면 느끼하지. 과해, 과해.

자고로 세트는 균형이 맞아야지.

여보가 달달한 거해. 내가 톡톡 쏘는 콜라 할게.


어쩌겠어. 이미 우린 세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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